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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리라

‘말라기’는 ‘나의 사자’, ‘나의 특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이 저자의 이름이 말라기인지, 아니면 익명의 저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말라기’라는 이름을 가진 제사장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신랄한 비판을 하는 내용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숨긴 제사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사와 제사장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부패에 대해 심각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직을 가진 사람인 것은 맞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가 자신이 매장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익명으로 활동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은 그 내용이 과히 날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목적입니다...

믿음은 역설이다.

'믿음은 역설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병욱 선생님은 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역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다는 것, 자신을 통하여 나라를 만드신다는 것, 그런데도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부터, 처음부터 이미 안 되는 것이지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아닌 어떤 능력 안에서 자기 자신"(칼 바르트, 로마서)입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것..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1-21 기원전 2세기경에 헬라 제국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대 지역을 지배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티오코스 4세 왕이 유대교를 대대적으로 핍박했습니다. 헬라의 문화와 신앙을 강요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위축되면서 동시에 반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땅은 헬레니즘적 유대인과 반헬레니즘적 유대인으로 나뉘었습니다. 기원전 166년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는데요. 헬라제국에 대항한 마카비 혁명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독립의 시기를 얻었습니다. 83년의 독립시기를 누렸습니다. 그때 헬라의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제우스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도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 때의 정신을 이어가던 종파가 바리새파입니다. 안식일 성수, 정결 예법..

믿음의 법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삶의 모든 부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된 것에 대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유다 공동체가 이루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작은 민족이지만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낸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견고한 테두리가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유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특별함과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더욱 열심히 견고하게 성을 쌓았지만 그것은 겉만 쌓는 형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형식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고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질과 내용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행위들이 나타나게 될..

타자 정죄는 내 의 자랑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씀은 모든 시공간을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그 의는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사건은 지금을 말하는 것도 아니구요, 옛날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의로 우리에게 개입하시고 모든 악과 세상을 가로질러 임하시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부분을 보면요. 하나님의 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의'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선언하시고 나타나는 의입니다. 우리가 그 의를 요구할 수도 없으며 우리는 의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전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 의의 근거느..

나를 아시는 주님

윤동주의 자화상을 보면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로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미워하기도하고 또 가엾어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떠났다가 다시 가엾고 그리워서 돌아갑니다. 이 사나이는 현실과 ..

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

로마서 3:19-20 율법은 구약시대 유대 공동체가 지켜야 했던 법률을 말하지만 더 넓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신 모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위인은 없습니다. 저는 율법을 잘 못 지키는 사람입니다. 유럽을 통해서 즉,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들을 잘 지키는지 확인, 평가 해 본다면 우리는 바로 '내가 제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자신 없어 집니다. 만약 '나는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주 일부분만 잘 지킬 뿐입니다. 누군가가 '나는 예배 시간 10분 전에 예배당에 도착해서 기도로 준비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원칙을 절대로 어길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언제 한 번은 무슨 일이 생..

창조주의 위치

로마서 3:9-18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보다 낫다' 또는 3장 앞부분의 말씀처럼 일부러 죄를 짓는 사람들과 비교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악을 행하는 자들과 비교하더라도 우리는 나 자신이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나 자신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나는 좋은 자식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모습 앞에서 아무도 자만할 수 없습니다. '나는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아', '나는 죄 많은 사람들 하고는..

씨 뿌리는 자의 땅

마태복음 13:1-13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나와서 해변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들자 예수님은 자리를 옮겨서 배위에 앉으십니다. 흔들거리는 배 위에 올라가 앉으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바다를 뒷 배경으로 두고 모래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방식은 전하는 자의 말 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는 앉아 있고, 듣는 자는 서 있는 것이 교육 현장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앉아 있고, 배우는 사람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반대로 된 것 같아요. 저희도 조금 변화를 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다시 예수님처럼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앉아 있고, 여러분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조금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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