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는 ‘나의 사자’, ‘나의 특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이 저자의 이름이 말라기인지, 아니면 익명의 저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말라기’라는 이름을 가진 제사장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신랄한 비판을 하는 내용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숨긴 제사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사와 제사장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부패에 대해 심각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직을 가진 사람인 것은 맞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가 자신이 매장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익명으로 활동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은 그 내용이 과히 날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배경의 연대를 보면요. 기원전 516년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총독 정치의 그늘에서 세금에 시달렸고 오랜기간 가뭄과 메뚜기 재앙도 식량을 사라지게 만들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 예언했던 메시야 왕국은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백성들은 실망과 낙담으로 냉소주의와 불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신앙은 종교적 위선과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민의식도 사라져서 이방사람과 결혼하고 십일조도 드리지 않게 되었고요. 율법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백성들 사이에서 율법의 정신이 퇴색되어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죄악이 흔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구별하신다고 전파합니다.
종말의 날에 악인들이 불에 타고 의로운 해와 치료하는 고아선이 여호와의 날이자, 두려운 날, 심판과 은혜가 있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라기의 특징을 보면요.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2장 17절에 보면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너희가 나를 괴롭혔다.’라고 말씀하시면 백성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혔습니까?’, ‘우리가 언제 그랬나요?’ 또 7절에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백성은 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돌아가는 겁니까?’ ‘우리가 떠난 적이 있나요?’
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물으시면 백성은 벋댑니다. ‘우리가 언제 도둑질했나요? 우리는 그런적 없는데요?’ 이렇게 벋대는 겁니다. 사실 이렇게 말대꾸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는 사회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좋아 보이는데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말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사는 형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태한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가 빠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종교적 허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정의와 사랑은 사라지고 그 껍데기만 아름답게 가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특사를 보낸다. 사자를 보낸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는 세례요한을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주의 사자입니다. 그리고 주가 갑자기 임하실 것이다.
그 주가 나타나는 날에 누가 견딜 수 있겠냐. 누가 살아남겠냐. 그는 금을 연단하는 불같이 우리를 연단할 것이고, 표백하는 잿물같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잿물은 나무를 태워 남은 재에 물을 부어 만든 물인데요. 이 물로 옷에 묻은 때를 제거했다고 합니다. 비누가 있기 전에는 이 잿물로 세탁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잿물로 옷을 빨고 세수를 하고 음식을 해 먹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은 우리를 연단하여서 고난을 이긴 후에 금과 같이 되게 하고 타고 남은 잿물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나의 기쁨이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고 장인이 도구를 만들 듯이 우리를 제련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의미없이 보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 안에 있음을 믿는다면 불과 같은 시련과 고난도 정금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훈련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불에 타서 사라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칫하면 위로가 아닌 폭력이 될 수 있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더 강하게 하십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지 않으셨다면 설 수 없었습니다.
불로 우리를 정련하시고 불에 타고 남은 잿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웃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레위 자손들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5절에 심판하십니다.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심판하십니다. 이 악한 모습의 예시를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요. 그 핵심은 십일조에 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느냐?”, ‘제가 언제 도둑질했습니까?’ 하나님은 백성을 향해 특별히 제사장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십일조를 도둑질했다.’ 도둑질 했다는 것은 헌금함에 있는 헌금을 몰래 가져갔다는 것이 아니겠죠?
십일조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심일조의 처음 등장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후에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천사라고 여기기도 하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써 있습니다. 멜기세덱에게 빵과 포도주를 줍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고, 내가 가진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또 여러 군데에서 십일조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신명기 14:28-29 말씀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를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는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18:21에서도 십일조는 레위인이 성막을 거드는 일에 대한 보수‘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인은 12지파 중에서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고 소유가 없이 오로지 제사의 일을 담당했기에 제사에서 남은 것을 그들이 가져가서 먹고 삶을 이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그들을 위한 예물이었습니다.
또한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떠돌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구제의 목적으로 십일조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첫째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목적이고, 둘째로는 그 재정을 교회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제 말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말라기 시대 제사장들은 지킬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십일조의 목적과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십일조는 열심히 하고 더 세세하게 지키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지켜 드렸지만 십일조를 왜 하는지는 잊어버렸습니다.
누가복음 11:32을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꾸는 정원의 박하와 운향의 십일조까지도 드렸지만 공의와 사랑은 버렸습니다. 안 해도 되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는 생색을 내지만 그 십일조의 목적과 뜻에 맞게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3장 3절과 10절에 나타난 ‘공의로운 제물’과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헌금의 사용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춰 정의롭고 공의롭게 제물을 드리고 사용했을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부으십니다. 밭의 열매가 ᄄᅠᆯ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이땅에 공의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고 사용했을 때 우리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땅이 아름다워질 것이다. 너희가 복되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십니다.
미가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미가서 6:8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의 것을 내 것이라고 쥐고 있지 말고 ‘나에게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소유를, 수확을 타자들에게 특별히 객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최근 한 집사님과 대화를 하다가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는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해서 늘 회개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하나님이 네 소유를 다 팔아 북한으로 가라’라고 하시면 못 갈 것 같아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북한으로 가서 선교하라고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그들의 주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했던 방식이 뭐냐면 ‘실제로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실천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말이 'Credo ut intelligam', Fides quaerens intellectum'.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해보라고 하셨죠. 우리의 가진 것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약한 자를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롭게 채우십니다. 저도 누군가를 위해 제가 가진 것을 다 드려보기도 하고 해봤지만 이것을 공식처럼 투자하듯이 하면 안 되고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로 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재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때 우리의 약자들은 힘을 얻고 더욱 풍요롭고 평등하고 아름다운 땅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참 행복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구하라고 하셨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의 가치로 욕심을 버리고 약한 자들을 위한 성읍과 사회를 이루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지키고 실천함으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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