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1-13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나와서 해변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들자 예수님은 자리를 옮겨서 배위에 앉으십니다. 흔들거리는 배 위에 올라가 앉으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바다를 뒷 배경으로 두고 모래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방식은 전하는 자의 말 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는 앉아 있고, 듣는 자는 서 있는 것이 교육 현장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앉아 있고, 배우는 사람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반대로 된 것 같아요. 저희도 조금 변화를 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다시 예수님처럼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앉아 있고, 여러분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조금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 비유, 가라지 비유, 진주를 찾는 내용의 비유 등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첫 번째 비유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제 말씀을 시작하시는데요.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쩔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배가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한 단락을 마치십니다.
이 비유를 보면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이 씨 뿌리는 자는 왜 길가에 씨를 뿌렸을까, 또 왜 돌짝밭에 뿌렸을까, 또 왜 가시덤불에 뿌렸을까, 그가 뿌린 것이 아니라 “떨어졌다”고 쓰여 있으니 아마 흘리거나 잘못 떨어진 씨앗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 농부들은 씨를 뿌릴 때 밭을 갈기 전에 씨를 뿌리기 때문에 그 씨앗이 밭에만 심기는 것이 아니라 주변 길가로 튀어 나가기도 하고 돌밭 위로도, 가시덤불로도 나가기도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 그러한 연구들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유를 너무 깊이 사실적으로 파고들 때 그 비유의 본질은 뒷전으로 빠지고 비유만 남는 착오를 범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차원은 이 땅에서의 차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차원이기 때문에 비유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방향을 알고 의미를 깨달으면 충분합니다.
땅의 종류가 여럿 등장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길가 같은 우리 마음, 돌같은 우리 영혼, 가시덤불 같은 우리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겠죠?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특별히 예수님의 설명이 기록으로 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예수님의 설명이 잘 남아있지 않는데, 이 비유는 예수님이 특별히 해석도 해주십니다.
첫 번째 땅부터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땅에 씨앗이 떨어졌나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누가 먹었나요? 새가 와서 쪼아먹었습니다. 19절에 이 길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떨어졌는데, 우리 마음이 길가와 같으면 그 말씀은 다른 대상이 와서 가져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악한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길거리 homeless와 대화를 나눈적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러자 그 분은 저를 쳐다봤습니다.
‘선생님, 어디서 지내세요?’라고 묻자
‘그런 소리 할거면 저리 가시오!’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제가 질문을 잘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조금 무례했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대화를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사람에 대해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길가에 있던 사람을 향한 제 말과 마음은 그에게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과 저 사이에 있는 심리적, 정신적인 것들 그리고 그 사람 위에 있는 악한 생각과 악한 것들은 말씀을 심기조차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이것은 악한 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핑계거리로 사용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사람 탓을 하려는 것도 아니구요, 제 탓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우리 세계에 드리워진 현실입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점으로도 우리가 천천히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터키의 오르한 파묵은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입니다. 그 작가는 자기의 소설 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했습니다. 허황된 꿈이지만 글로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자신의 성실과 열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터무니 없는 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우물을 파내는 자들이고 이드거니 힘쓰는 자들입니다. 힘빠지는 일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지만 희망을 내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씨앗이 두 번째로 떨어진 땅은 흙이 얕은 돌밭이었습니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오래 가지 못하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박시은, 진태현 부부를 아시나요?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실 것 같은데요. 배우로 활동을 하고 기독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또한 많이 알려졌습니다. 부부가 보육원 봉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섬기고, 또 입양을 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 부부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는 오랜기간 기도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이를 갖는 것인데요.
나이가 있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산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알려진 바는 세 차례 한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마지막 유산에 대한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힘겹게 아이를 얻었습니다. 9개월간 기쁨과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새 생명을 맞이할 준비만 하며 하나님께 매일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출산을 한 달 앞에두고 배속에 아기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심장이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죠. 그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자신의 Social Network Service인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앞 부분을 생략하고 중간 부분만 보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뜻이 있고 그 뜻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한치의 오차도 실수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저희부부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태은이가 다시 와줄거라는 희망을 품고 몸부터 회복하고 마음은 천천히 회복해가려구요. ”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깊이 뿌리 내린다는 것은 환난 속에서 씨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그리고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와 모든 하나님의 세계를 펼쳐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죠. 지극히 개인적인 나 자신의 목표들을 위한 삶이 아니라 돌짝밭 같은 나 자신의 마음을 기경하시고 다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시고 끝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냐로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의 실력과 능력이 나를 자라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실력이 나를 인도하시고 끝까지 견인해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데 있어서 실수하지 않으시고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신뢰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비유입니다.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신세계’라는 시에서 현실을 면밀히 살핀 후에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정상적인 것들은 가장 짧게 지속되고
비정상적인 것들을 이해하기는 너무 쉽고
순응하기는 더욱더 쉽다
그 쉬움이 너를 안심시키지 말기를”.
우리는 얼마나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지요. 이것은 세상에서 적응을 잘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물들어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들 때문에 말씀 하나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사실 간단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주는 메시지가 간결하죠. 우리가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이 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죠? 좋은 밭이 되고 싶지만 우리는 부족합니다. 여전히 길가와 같이 흩날리고 악한 영이 우리를 사로잡고, 악한 생각에 마음 빼앗기고, 또 돌짝밭처럼 우리 신앙의 뿌리는 깊지 못해서 금방 메말라 버리고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또한 가시덤불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수많은 자본의 가치들, 상대적 유혹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만 섬기지 못하게 하며 두 주인을 섬기게 만듭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돈은 유사 전능성'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돈은 우리에게 전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돈을 헷갈려하며 두 주인을 같이 섬깁니다.
이렇게 부족한 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농부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씨앗을 뿌리는 자가 되시고 밭을 갈아 엎으시고 자라게 하셔서 결실을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쥐고 계십니다. 우리가 길가와 같고 돌짝밭 같고, 가시덤불 같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씨앗을 뿌리고 계시고 우리에 돌을 부수시고, 가시덤불을 치워 마침내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해 내실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신뢰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실력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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