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수요강해

진리에서 오는 기쁨_느헤미야8:1-12

E.step 2022. 7. 2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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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재건했지만 이제 진짜로 다시 세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성벽을 짓고나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7월 첫째 날인 나팔절이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모두 모였습니다. 7월 첫 날은 이 때 신년으로 모인 날이었습니다. 새해 첫 신년예배를 드리듯이 백성은 7월 첫 날에 모여 나팔을 불며 신년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10일동안은 대속죄일까지 가장 경건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림을 보면요. 오른쪽 중간쯤에 있는 문이 수문입니다. 저 곳에서 성벽 바깥쪽을 향해서 에스라가 섰습니다. 사람들은 성벽 바깥에 넓은 곳에 모여서 있었습니다. 학사 에스라라고 나오는데요. ‘학사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서기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당시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등을 에스라가 정리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에스라는 포로기시대 유다 공동체에게 중요한 인물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들의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이었습니다.

 

백성은 자발적으로 에스라에게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오십시오. 그래서 에스라는 모세오경을 가지고 회중 앞에 섭니다. 이 때 에스라가 읽었던 말씀은 신명기일 가능성이 큰대요. 왜냐하면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들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되새기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기 이후에 자신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 때에 필요한 말씀이 출애굽 한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되새기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나무 단 위에 섰습니다. 율법을 알아들을 만한 자들은 모두 다 나왔습니다. 에스라가 나무 강단 위에 올라가서 두루마리로 된 모세의 책을 펴자 백성들은 일제히 기립합니다. 굉장히 멋있는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백성들의 자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되지 않을까요? 말씀 듣는 시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일어나는 거죠. 에스라와 백성들은 새벽부터 점심까지 낭독했다고 하니까요. 6시간 이상은 일어서 있었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뭐 30분 정도니까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마 다들 자리에 한두 분씩 앉겠죠.

 

 에스라는 한 대목이 끝날 때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그렇게 말하면 백성들은 모두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문제가 해결됐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벽을 지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백성들을 구해내신 것처럼 앞으로고 구원해내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찬양했기 때문에 모두 감격에 벅차서 감사합니다. 자신들의 형편을 보며 무너진 자신의 삶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강하신 하나님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7절에서는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 곳곳에 자리 잡아서 율법을 설명해 줍니다. 백성이 너무 많아 멀리 서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의 말을 전달하는 보조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이크도 없었으니까요. 아마 에스라의 말을 듣고 또 멀리 전달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에스라의 율법 낭독을 설명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통역의 작업인데요. 포로생활을 몇 세대 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언어는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가 익숙해진 세대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워서 사용할 줄 아는 자들도 있고, 히브리어를 사용해오던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중동지역으로 끌려가서 그 세대의 자녀세대, 그리고 자녀세대까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하는 백성들을 위해 에스라의 히브리어를 다시 아람어로 통역하는 과정이 그들이 맡은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이해를 시켜주는 것이 레위인들의 역할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도 그가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것 중에 하나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로만 기록되어 있었던 성경을 사제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대중화 시킨 일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도 큰 몫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사제들이 라틴어로 읽고 회중들에게 회중의 언어로 설명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직접 성경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성경의 번역과 보급화가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개혁과 번역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도 쉽지 않았죠. 그런 소중함이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에스라의 말씀 낭독을 듣고 모든 백성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동안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회개,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를 잊고 포기했던 자신들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죄로 인한 나라의 멸망이었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옛날부터 구원해내시고 인도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구나, 하는 죄의식에 대한 눈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고 울지마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

 

이 기쁨은 슬픔을 겪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충만함입니다. 우리가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고 하지만 울음을 흘린 사람이 진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좋은 일이 있어서 행복하고 기쁠 때도 있지만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 채워지는 기쁨은 더 충만합니다. 우리 안에 눈물로 필요없는 것들을 씻겨내고 버렸기 때문에 그 안에 더 새롭고 가득하게 기쁨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고 힘든 일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기쁨은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기도했을 때도 느낄 수가 있는데요. 함께 기도회를 통해 기도하고 서로의 눈물을 보고 마음을 나누며 마음을 쏟아 놓았을 때 우리는 서로가 하나 됨을 느끼구요. 차오르는 감정을 느낍니다.

 

오늘 백성들은 에스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결국 힘을 얻는데요.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입니다. 다바르는 에너지로 가득찬 말씀입니다. ‘다바르는 말씀이라는 뜻도 있고,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만큼 말씀은 말의 의미만이 아닌 능동적인 움직임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일적인 의미로 에너지로 인한 행동이 있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아 깨닫게 하시고, 에너지로서 힘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근원적인 기쁨이자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인해 여러 노력들을 합니다. 잘 되지 않아서 우울해하기도 하구요. 다른 방법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만족의 기쁨은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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