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수요강해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더냐

E.step 2023. 1. 10. 17:24
728x90
퇴비 위의 욥 - 피터 네프 1세

 

욥기 4:1-21

이 그림은 피터 네프 1세의 <퇴비 위의 욥>입니다. 그림 가운데에 벌거벗은 욥이 있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욥을 보여주고 있죠. 그리고 양 손을 들어 의문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몸짓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네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왼쪽의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여인은 욥의 아내입니다. 고통 당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욥을 향해서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겠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말했던 아내입니다. 아내의 오른손은 허리춤에 있고요. 왼손은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독기가 보이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세 명의 친구가 서 있습니다. 가장 오른 쪽이 엘리바스처럼 보이고 그 다음에 빌닷, 소발로 보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욥을 보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입술을 만지며 훑어보기도 합니다. 뭐가 문제일까? 뭐가 잘못됐을까?

 

욥의 고통을 보며 원인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욥의 고통에 참여하고 공감하는 일을 멈추고 고통의 원인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인간의 악한 버릇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저 사람은 무엇을 잘못했을까? 권선징악의 틀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차갑습니다. ‘죄 없이 이런 일을 겪을 수는 없다. 네가 무슨 죄가 있는지 생각해봐라’ 이렇게 묻습니다. 욥의 존재는 사라지고 신학적인 교리만 남은 상황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신학이 무턱대고 대입된 결과입니다.

 

엘리바스는 신학적 교리, 자신의 신앙적 경험으로 공식을 만들어서 욥에게 대입하는 것입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답정너’라고 하죠. 엘리바스의 신학 또는 엘리바스의 경험으로 욥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네 자식들이 죽고 집이 무너졌다’라는 것입니다.

 

참 잔인한 말입니다. 친구라고 한다면 그저 위로하면 될텐데 꼭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에 이런 딱딱한 말, 공감하지 못하는 말들로 욥의 가슴에 더 심한 상처를 줍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우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손에서 발로 가는 것이 좋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세상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면 그 머리는 타인을 위해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도와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참 안 됐어’라는 말보다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손보다 발이 더 좋다는 것은 같은 자리에 서는 것, 찾아가는 것이 더 좋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은 나오지 ㅇ낳습니다. 입은 좋은 방법이 못되나 봅니다. 울고 있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로 힘든 일을 겪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암에 걸리셨는데요. 목사님이 위로해주신다고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은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시기도 합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그 자리에서 화를 내시면서 ‘목사님, 그걸 위로라고 하십니까, 제 아픔은 아무것도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시면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집사님이 과하신 것 같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괜한 말보다는 그저 안아주는 것,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사람에게 내 발을 사용하는 것만큼만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잠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모두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이 잘 안 된 것,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자녀가 세상을 떠난 것, 병에 걸린 것, 더 나아가 전쟁으로 죽는 우크라이나 시민들, 아프리카 기아들, 이태원 참사, 성폭력 당한 사람, 살인 당한 여성 이것들이 다 우리의 인과응보냐는 것입니다. 불교적 언어로 업보라고 하죠.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의 신학으로 욥을 바라봅니다.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일반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모두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맹신이라고도 합니다.

 

엘리바스는 이제 자신의 신비 체험을 말합니다. 12절부터 그 내용인데요. 어느 날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가 악몽처럼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자신의 작음과 부정함을 인식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어는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적 윤리를 뚫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었던 모습을 분석하며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들가지도 믿지 않으시고, 천사들에게마저도 허물이 있다고 하시는데, 하물며,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사람이겠느냐?

 

엘리바스의 말은 다 옳아 보입니다. 자신의 신앙적 체험까지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마치 하나님의 말과 같습니다. 가끔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자신의 종교적 호나상으로 남을 가르치려 하는 분들이죠.

 

그러나 그 체험들은 자신을 과시하는데 사용한다면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아닌 비판을 위한 말이라면 주의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바스의 경험은 인간의 티끌과 같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와 존귀로 관 씌우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티끌과 같은 존재지만 또한 존귀한 자이기도 합니다. 엘리바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맡기신 분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맡기시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또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엘리바스는 인간을 존귀히 여기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적인 신념과 원칙에만 갇혀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엘리바스와 같은 태도가 있지 않은지요. 내 신앙의 자매 형제를 바라볼 때 내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 결험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또한 우리가 지나치게 사람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있지는 않은지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선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악이 되기도 하구요. 다른 이에게 악이지만 나에게 선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믿음의 가족들을 긍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자가 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섣부른 조어보다는 함께 아파하는 위로자들 되길 소망합니다.

728x90

'하늘뜻펴기 > 수요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1) 2023.04.26
꽤 괜찮은 해피엔딩  (0) 2023.04.06
언약을 이루시는 헤세드 하나님  (0) 2022.10.27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리라  (0) 2022.10.19
씨 뿌리는 자의 땅  (2) 2022.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