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수요강해

꽤 괜찮은 해피엔딩

E.step 2023. 4. 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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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42:1-17

욥과 친구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논쟁을 했습니다.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불쌍하게 봤지만 욥이 하나님께 대들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고난 받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니 욥의 친구들은 거기서부터 불온하다며 욥을 가르치려 듭니다. 신앙적인 논쟁과 파가 생겨나는 거죠. 그리고 38장부터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자신의 고난의 까닭을 묻는 욥에게 하나님은 다시 묻습니다. 세계가 창조될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모든 생명들이 잉태할 때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너의 생명이 너의 것이냐?’ 까닭을 묻는 욥에게 하나님은 세계의 근원과 인간의 근본을 묻습니다. 모든 주권이 절대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 아닌 세상의 초월자이신 분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부입니다. 세상이 나를 향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그를 위하여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비관하며 바라봅니다. 왜 내 맘대로 되지 않을까. 하나님이 날 위해 계신다면 왜 내 삶은 성공하지 못할까. 이런 비관적 자세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위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위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분으로 내 삶이 잘 되길 바랍니다. 병에서 낫고자 하는 것도, 자식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도, 돈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욕심도 하나님을 위해 이루고자 하지만 사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욥기가 워낙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라 우리가 엄밀히 말해야 합니다.

 

 정말로 깊고 근원적으로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우리가 병에서 나아야 하나님께 영광인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져서 다른 사람을 돕고 주변 가족과 친척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한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런 일들을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목표는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면 됩니다. 하나님에게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또 구하며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길 살아가야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서 온전히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이치를 이제야 욥은 깨닫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보는 것이죠.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표현입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게 낫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았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성경지식으로부터,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깨닫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보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닌 전인격적으로 깨달아 안다는 것입니다. 깨달을 자는 배울 자와 볼 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습니다.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깨달아지고, 이제 욥은 교만한 자신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안다고 말했던 자신의 태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시는데요. 욥의 친구들에게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이 그대로 하고 욥이 친구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신 후에 친구들을 찾아가셔서 욥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하시고요. 욥에게는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욥에게 정죄한 것들, 함부로 말한 것들을 사과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도 그들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참 이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 다음에 다른 이들에게 가서 그 관계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만 좋다고 해서 끝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자라면 다른 이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욥에게 복을 주십니다. 동물들과 자식들을 두 배로 주시는데요. 아들 셋과 딸 셋을 주십니다. 이게 좋을까요? 원래 자식들은 다 죽고, 새로 자식을 주신다고 하셔도, 더 많이 주신다고 하셔도 이것이 좋을까요? 저는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아들 두 명을 데리고 가시고 더 건강하고 잘 난 아들 둘을 주신다고 하셔도 저는 안 좋을 것 같습니다.

 

평생 잃어버린 두 아들을 생각하며 그 상처는 치유받지 못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욥이 기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욥은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맡기는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은 가축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자식이 많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만난 것, 삶의 참담한 고통 속에서 원망했던 삶에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발견하고 삶의 목적을 발견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정체성이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없이 소유만 생겨났다면 그는 또 소유를 잃었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 이후 그는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과의 신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신뢰적 관계가 그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지선씨를 알고 계실까요? 이지선씨는 2000년 여름 대학4학년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교통사고를 만났다고 표현을 했어요. 친오빠가 옆 학교를 다녀서 늘 같이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신호등 앞에 정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주 5병을 마신 운전자가 브레이크가 아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달려와 남매의 차 뒤를 들이 받았습니다.

 

너무 세게 받혀서 중앙선을 넘어갔다가 튕겨져 나오기를 반복하고 일곱 대의 차와 충돌한 끝에 불이 났습니다. 그 불이 이지선 씨의 몸에 붙었고 뉴스에 날만큼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어 수술을 40번이나 넘게 했습니다. 손가락도 절단했고요. 이제 그는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생명에도 위급한 상황이었고, 몸과 얼굴은 화상을 입은 채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지선씨는 2003년에 인간극장에도 나왔고,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최근에는 유퀴즈 프로그램에도 나와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에서 사고를 생각하면서 당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이제는 사고를 만났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고를 당했다라고 표현하면 계속 피해자로서 살아가는 것 같고 자신을 피해자로 소개하는 것 같아서 이제는 그 사고로부터 시간도 많이 지나고 회복이 되어서 사고를 만났다라고 바꿔서 표현을 합니다.

 

삶이 달라진거죠. 그 과거의 사건에 머물러있지 않고, 상처와 트라우마에 갇혀있지 않고 사고가 반갑지는 않지만 어쨌든 만났으니 만났다라고 표현을 하니까 이제 그 사고와도 잘 헤어질 수 있게되었습니다. 그는 죽고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삶의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거기에 없었더라면 이라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작은 차를 사준 것에 후회하며 더 큰 미안함과 죄책감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냈던 운전자를 향한 그의 생각이 놀라운데요. 가해자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지만 피해자를 찾아오거나 합의하는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중에 그녀가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요. 혹시 찾아오면 용서해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미워하고 분노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고통과 수술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그 가해자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은, 그 미워하는 감정만큼은 피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배려였다고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는 생각을 안 했던건 아니지만 운명을 탓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집중하며 사는 쪽이 나에게 이로울 것 같아 그쪽을 택했다고 합니다. 하필 나였어야 했던 까닭이란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또 백날 고민해서 알게 된다 한들 어쩌겠는가. 어차피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는데, 그렇게 어제를 살지 않고 오늘을 살다보니 세상에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나쁜 일이 그날 밤 내게 일어났을 뿐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회복을 하면서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상처 입은 우리가 회복하는 동안 마음속 어떤 부분은 키가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성숙하며 전에 갖지 못한 관점을 갖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를 심리학자들은 외상 후 성장이라는 개념으로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긍정적 변화를 말합니다.

 

사고가 있었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재수 없는 날을 비관하는 것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견디고 내게 남은 것들을 헤아려보며 새롭게 얻은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을 이야기하는데요. 엄마의 기도와 눈물을 보이지 않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 고등학교 친구들이 찾아와 즐겁게 수다를 떠는 그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편안한 가족과 친구의 관계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별하지 않게, 그저 편안하게 대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통해 희망을 얻고 견뎌야지,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내가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랑하신 이들을 계속 사랑하는 과정이다.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 잊힌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권리와 기회를 누리도록 돕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소중한 이웃으로,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 삶이 나의 상처와 고통에 얽매여있지 않고 이제는 그곳으로부터 나와 상처를 입었지만 상처를 보이며 다른 이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에 내 삶을 내어 맡기고 드리며 그 정체성으로 내 삶을 사용하고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통해 내 삶 그대로를 하나님께 드려서 많은 이들에게 선물로 내어줄 수 있는 거룩하고 복 있는 사명자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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