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새벽

타자 정죄는 내 의 자랑이다.

E.step 2022. 10. 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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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이라는 말씀은 모든 시공간을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그 의는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사건은 지금을 말하는 것도 아니구요, 옛날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의로 우리에게 개입하시고 모든 악과 세상을 가로질러 임하시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부분을 보면요. 하나님의 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의'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선언하시고 나타나는 의입니다. 우리가 그 의를 요구할 수도 없으며 우리는 의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전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 의의 근거느 ㄴ우리 자신에게 없구요. 하나님에게 그 기준과 토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주시는지 왜 안 주시는지, 언제 주시는지, 어떨 때 나타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기준이 있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준 지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실거야'라는 우리의 바람을 하나님에게 적용시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를 창조하시고 아셔서 의의 선언도, 심판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행동하심과 인도하심에 의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우리는 우리를 굉장히 자기 기준과 자기중심성에 가둬놓고 의를 따져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받을 뿐이고 불리울 뿐이지 의의 기준이 아닙니다.하나님께 전부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의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차별도 따질 수가 없습니다. 왜 누구는 의롭다고 하시고 누구에게는 의롭다고 하지 않으시는지 차별하신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계산과 생각을 허무시고 뛰어넘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기서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기준과 공식을 생각한다면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겠죠.

미국에서 한 교회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기도제목을 내놓았습니다. 그때는 걸프전이 시작되던 때였는데요. 그 목사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사담 후세인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 사람이 교회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 평생에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담 후세인을 사랑하실지, 또는 예수님께서 범죄자들을 사랑하실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케제만이란 신학자는 말합니다. '칭의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일하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절대적 의를 위해서 "믿음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계산과 바람들을 무너뜨리고 역사하신 '하나님의 의'의 선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 이방인을 보고 의로운지 아닌지 평가할 수 없고 죄인인지 아닌지 평가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과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은혜를 말하기 위함이지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지 '나는 의롭다고 여김 받았고 당신은 의롭지 않다'라고 편가르기를 하거나 차별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과 은혜 받은 것을 힘입어 누군가를 정죄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면 예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이 아닌 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 자랑은 곧 타자 정죄와 같습니다.

칼 바르트,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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