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새벽

복음이 나를 부끄러워하는가

E.step 2022. 9. 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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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우리를 부끄러워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이겠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저 복음을 전하는 이라고 생각한다면,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부끄러울 것이 아닙니다.

 

2.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하는 나 자신이 복음을 말할만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까봐, 또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길까봐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꺼내기는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주제일 수 있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서 나는 복음을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가?’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3.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너나 잘해라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똑같이 연약한 사람들이고, 부족함 많은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하게 복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복음에 의탁해서 살아갑니다. ‘아 내가 복음을 받았지, 아 내가 복음을 알아서 감사하지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4. 우리가 대단해서도 아니고 내가 예수 믿고 잘 돼서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믿고 잘 된 사람 없습니다. 또 여기서 잘 됐다라는 의미는 우리 모두 성공으로 받아들입니다. 사회적 기준으로 잘 된 것들, 그런 의미에서 잘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이것은 모두 복음을 알지 못한 자들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의 말과 상관 없이 하나님과 나 사이가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면 되지 않나요?

 

5. 설교가 잘 안 써질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묵상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냐면 내 삶이 형편없을 때입니다. 설교를 할만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설교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능력으로 나타날까?, 내 말에 힘이 있을까?’ ‘나는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그래서 설교자의 고민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말을 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고싶지 않은 말도 해야되고, 그렇게 살지 못해도 말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6. 왜냐하면 설교자도 그저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선 자나 앉아 있는 여러분이나 동등합니다. 그저 앞에 섰을 뿐이고, 말씀을 맡았을 뿐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마음대로입니다.

 

7. 그래서 그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제게 있는 것이 아니구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바르트는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은 누가 그것을 대변하거나 실어 나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복음이 그것을 듣고 선포하는 사람을 대변하고 그들을 운반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8.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은 무엇인가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가두는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모든 억압, 나를 부정적으로 이끄는 것들, , 교만, 그 모든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아닌 것들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아닌 것들을 향해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9.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악을 향해서, 거짓을 향해서, 정죄를 향해서, 왜곡된 진리를 향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막는 것들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요가 우리를 긍정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외치시는 아니요가 우리를 아닌 것들에서 꺼내시고 가지치게 하십니다.

 

10.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기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 대한 단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단어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와 길을 보이는데요. 바로 신실믿음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냐 아니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믿음이냐인 것입니다.

 

11. 그러나 이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우리가 같이 받아들여야 할 믿음에 대한 의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함을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만 가지고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능력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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