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주일저녁예배

내가 그라

E.step 2023. 3. 17. 15:58
728x90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ㅣ<예수와 사마리아 여인>ㅣ1655년경ㅣ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즈음해,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유리천장지수’를 발표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여성 지위를 평가하는 지표인데요. 2022년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31.1%로 OECD 평균(12%)의 2배를 넘습니다. OECD국가들 중에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 평균이 12%인데 우리나라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가 평균의 두 배 이상인 31.1%나 됩니다.
 
그래서 올해 여성의 날 캠페인 주제는 ‘공정을 포용하라’(Embrace Equity)입니다. 여성에게 있어서 커다란 어려움은 출산·육아·가사노동 부담 같은 허들이죠. 개개인의 상황을 고려한 기회와 자원의 공정한 배분만이 진정한 ‘평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공정’에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별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누가 더 힘드냐’, ‘누가 더 대우를 받아야 하냐’의 싸움으로 가서는 안되고 여성의 날이 왜 생겨났는지, 이들이 투표권도 없고, 무시 당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정한 문화와 기회 속에서 살고자 하는 바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세울 때 그 헌법 정신의 큰 부분은 남녀의 차이와 신분의 귀천,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등’한 국가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급과 불평등이 가득한 조선시대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면서 일제강점기 시대에 민족의 지도자들은 독립자유평등의 나라를 꿈꿨습니다. 그런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와 그리스도인의 영향이 컸습니다. -경향신문, <3.1 독립정신>,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조선말기에 선교사님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아픈 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열심이었고요.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특히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켜주고,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며 우리나라를 계몽시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선교사님과 한국 초기 교회 선배님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생각하다가 여성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남편 다섯’이라는 말은 에스겔 23장 4절에 나오는 오홀리바와 오홀라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이 두 여인은 행음하는 여인으로 나옵니다. 오홀라는 사마리아고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비유적으로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음을 하는데 어떤 나라 사람과 행음을 하냐면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사람들과 행음했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에게 넘어가 그들과 통정했던 여인들입니다.
 
어쩌면 사마리아여인도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하기를 반복한 여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강대국의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결혼했을 수 있고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취해지고 버려지기를 반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형편이든, 바르지 못한 여인이든 그는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요. 그 사마리아 땅에서도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땅에 예수님은 찾아가셨고,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을 거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는 주제가 진리에 대한 갈증과 추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내용이 예배의 장소에 대한 것을 묻습니다. ‘예배는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남북이 갈라지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내려갈 수 없게 되자 모세가 죽기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했던 축복의 산 그리심산을 예배 처소로 삼아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혼혈인이고 불결한 사람들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예배 장소가 옳은 것인지, 자기가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 것인지 여쭙는 것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은 하나님의 영이고 ‘진리’도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맞춰지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영과 지성이 그분에게 이끌리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에 민첩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영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진리’는 인격적인 견고함을 말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인데요. 그 진리 되신 하나님은 지성으로만 계시지 않고 인격적인 관계로서 우리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견고하게 계시기 때문에 진리되십니다. 어제도 같은 하나님이고 오늘도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제는 내 자식이었지만 오늘은 내 자식이 아니다 라는 것은 인격적으로 견고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과 아버지 사이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지난 주에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가요. ‘너희는 너희 엄마가 너희 엄마라는 걸 어떻게 아니? 너네가 본 것도 아닌데?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아이들이 흥분하면서 ‘당연히 우리 엄마죠’, 그래서 제가 ‘너네가 태어났는데 너무 못생겨서 바꿨을수도 있잖아?’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러면 안 되죠. 그럴리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엄마는 인격적 관계 안에서 진리입니다. 엄마와 자녀 사이는 반전 막장 드라마가 아닌 이상 변하지 않는 진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시고 나는 그 자녀가 된다는 것이 진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들 삼아서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되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가야만 내가 자녀됨을 인정받고 마음에 안심이 되는 것처럼 그 관계 안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증명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렇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감동과 민첩한 마음 그리고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해서 참 예배자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찬양이 떠올랐어요.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그 곳에 울고 있었던 네가 있어서
햇볕이 따갑고 그늘도 없는 낮에
나는 기다렸단다 네가 내게 오기를
아무도 찾지 않는 한 낮에 우물가에
어젯밤 울다 잠든 네가 내게로 온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 낮에 우물가에
이제껏 삶에 지친 네가 내게로 온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
기쁨에 차 말을 건다
하늘보좌 내려놓고 여기에 왔다고
넌 내게 다시 이리 재촉한다
그 물을 내게 달라 한다
넌 이미 보았다 그 물이 여기에
바로 내 안에 있다
 
 사마리아여인은 물을 달라고 재촉합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다” 영과 진리로 예배해라. 하나님은 그 예배자를 찾으신다. 이것이 우리의 해결입니다. 가난한 마음, 알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영과 진리의 관계 안에서 우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신뢰하며 우리를 맡기고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우리를 온전히 내어 드리는 예배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728x90

'하늘뜻펴기 > 주일저녁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아들이 살았다.  (0) 2023.06.07
양식의 의미  (1) 2023.05.12
사마리아에 가신 예수  (0) 2023.02.12
위로부터 오시는 이  (0) 2023.02.01
흥하십시오.  (2) 20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