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동부 아이들이 성탄절 발표회 연습을 하고 학생부 아이들도 연습을 했습니다. 아동부의 몇몇 아이들이 남아서 연습도 하고 2층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하온이, 정원 이, 고은이 이 아이들이 재밌게 놀고 있었습니다. 셋이서 얼마나 재밌게 노는지 모릅 니다. 제가 지나가면 제게 말도 걸면서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저도 장난끼가 발동해 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발장 맨 위에 숨겨두었습
니다.
아이들이 내려오다가 신발이 없어져서 단체로 맨발로 오더니 제게 신발 어디다 숨겼 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신발장에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알고 꺼내려고 했지만 키가 닿지 않아서 힘겹게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제게 복수한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제가 2층에 올라간 사이에 제 신발을 가져가서 몰래 숨 겨두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랑 놀면 재밌습니다. 아이들은 예상한대로 행동하거든요. 장난치는대 로 똑같이 장난치고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물론 꽤 끈질깁니다. 어제도 몇 번을 복수 하고, 오늘 아동부 예배 전에도 계속 제 신발을 숨기더라구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제 게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제가 ‘이놈들아, 전도사님이라고 불러야지!’라고 하 지 않죠.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자기는 교수라고 불리는 것보다 선생이라고 불리는게 더 좋다고 했습니다.
선생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의미가 좋다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제게 그렇게 부르면 6학년 형아가 나타나서 ‘야 선생님이 아니라 전도사님이야’라고 가르쳐줍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질서를 잡고 교육을 시키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잘 노는 모습을 보면 보기 좋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같이 놀아주면 감사한거구요. 아이들 을 담당하는 자리에 있지만 뿌듯한 마음이 들 때는 아이들이 서로 잘 노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제가 개입하지 않아도 서로 서먹했던 아이들이 같이 즐겁게 놀고, 이야기하고, 뭔가를 해나가려고 할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 뿌듯합니다. 하나님도 그 마음일거라 생각합니 다. 우리가 서로 잘 노는 모습, 우리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려고 하는 모습, 서로 관계가 좋아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도 행복할 겁니다. 그런 아이 들과 함께 어울리며 놀 때 즐거움이 생깁니다.
아이들이 제게 쌤이라고 부르든,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제가 아이들과 게 임하다가 인디안 밥을 맞고 벌칙에 당첨될 때 제가 스스로 세우려고 했던 권위보다 더 깊고 넓은 권위가 세워집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자신을 낮추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겸손의 왕이었습니다. 서로가 자신을 낮추고 서로 를 높이는데 자신들의 권위만 올라갑니다. 두 분이 큰 그림으로 계획 했을지도 모릅니 다. 그만큼 두 사람의 권위는 논쟁이 있을만큼 높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세례를 베푸시고, 세례요한은 그보다는 조금 먼 애논이 라는 요단강 근처에서 세례를 행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와 어떤 유대인과 논쟁이 생깁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더 권위가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세례가 더 권위가 있습니까? 누가 더 정결하고, 누구의 세례가 더 힘이 있습니까? 이런 논쟁과 변론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찾아가서 ‘요한 선생이여, 당신과 함께 있던 예수가 세례를 베푸는데 사람들이 다 거기로 갑니다. 그에게 더 권위가 있는 겁니까?’라고 묻 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렇게 묻는 겁니다. 자신의 선생님이 더 권위가 있 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더 인기가 많아지는 것을 보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사람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 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 들이다.”
예수의 권한을 하나님에게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성이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풀지라도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하룻밤을 보내는데 신부의 정결함이 확인되면 신랑은 밖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기뻐서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것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서 신랑과 신부의 성공적인 결혼을 마음껏 축하합니다. 그 기쁨으로 인하여 충만하다고 말합 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 교제, 정결해지는 그 사건들로 인해 세례 요한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기다린 사람이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사명을 시작 하신 일들로 인해 너무나 기쁜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도 소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이야기입니다. 김제 금산면 금산리에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요. ‘ᄀ’자 로 되어 있는 교회가 역사를 잘 보여줍니다. 조덕삼은 그 일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은 머슴이었습니다. 선교사 테이트에 의해 조덕삼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조덕삼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산교회의 교인이 늘어나자 장로 한 분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을 두고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주인이자 부자였고, 이자익은 조덕 삼을 모시는 머슴이었습니다. 누가봐도 주인인 조덕삼이 장로가 될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반전이었습니다.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된 것입니다. 사람들 은 술렁거렸고 그때 조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목사가 된 머슴 소년
조덕삼은 실제로 평생 이자익을 섬기고 후원했습니다.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서 공 부할 때도 학비를 지원해주고 담임목사로 청빙을 했습니다. 사람을 육신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 영적인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은 이런 경우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주인 조덕삼도 나중에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런 말을 썼습니다. 조금은 레 디컬한 분인데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추상적이며 관념에 머문 신학을 가르치 지 않았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사꾼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 정말 똥 짐을 지는 목회자는 없는 것일까?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 을 지실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하느님
늘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저로서는 늘 마음에 남는 가르침입니다. 말로 하기보다는 삶으로 살아야 하는데, 말을 하는 것만큼 살아가지 못하는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가 길지 못하는 이유도 그 중 하나이겠죠. 그러나 이 모 든 말들은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갑시다!’ 라고 다짐하는 마음으로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와라’라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십자가 대신 똥 짐을 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악세사리가 되기도 하고, 내 자랑이 되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높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 구유에 내려오신 것처럼, 말구유에 내려오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셨듯 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아름다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거나, 힘을 세우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 낮아질 것입니다. 더 추해질 것입니다. ‘He must become better, I must become less' 그는 당연히 흥해야 하고, 나는 당연히 쇠하여야 한다. 우리가 혹여나 반대로 되 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두타산에 가보면 미륵바위가 있습니다. 그 미륵바위에 뭐라 고 써있냐면, “이 바위의 형상인 미륵불, 선비, 부엉이처럼, 미래의 희망, 학업의 성취, 부자의 꿈을 노래하자”
이것을 표층종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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