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자화상을 보면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로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미워하기도하고 또 가엾어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떠났다가 다시 가엾고 그리워서 돌아갑니다. 이 사나이는 현실과 자아의 부조화 속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은 시죠. 현실의 암담함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지만 또 그 속에서 자신을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지키려는 모습을 가엾어 하기도 하는 고민의 모습을 담은 시입니다.
우리도 늘 이런 선택과 고민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가죠.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가엾은 존재가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 23절에 보니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 라고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시간순으로 기록하지 않고 사건순으로 예수님의 참 인간되심과 참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조금 다른 시각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라고 나오는데요. 왜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라고 나왔을까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 또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라라는 표현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능력을 행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구약시대 때부터 그 사람의 본질을 담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사실 그 이름은 하나님을 다 담아내기에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거죠.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을 향해서 수식어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사랑의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 이렇게 수식어를 붙여서 하나님을 부르고 나에게 필요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가장 먼저 알려주신 사건이 있는데요. 그것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모세가 불에 타고 있지만 상하지 않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시죠.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러나 이 말은 ‘나는 곧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I am who I am'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다른 것에 영향 받지 않는 독립적인 ’나 자신‘이다. 나는 홀로 있는 자다. 이 말은 당시 많은 우상들과 신들의 이름을 지어서 그들을 섬겼던 우상문화의 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이름짓지 않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나는 나야‘라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긴 하지만 정의 내릴 수 없는 분의 이름입니다. 그저 우리가 부르기 위해서 부를 수 있게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지자들은 말하였고, 그 능력을 힘 입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도 자신의 이름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기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힘 입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사용한 이름의 어원은 ‘오노마’인데요. 이름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명성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24절부터의 내용을 봤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의 속을 다 아시고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는 그 사람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의 명성을 믿었다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목적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님에 대한 신기한 일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아픈 자도 치료하시고 가난한 자도 먹이시는구나 오늘 나는 진짜로 봤어, 우와 신기하다’라는 그 기적을 믿은 것입니다.
자신의 물질의 문제, 세상에서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해 나가는 문제들을 기적적으로 해결하시는 예수님을 믿은 것이죠.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 건가요? 내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추어 봤을 때 잘 되게 하시는 분을 믿으시나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내가 예수님 잘 믿어서 대형교회 목사가 되야지’, 내가 예수 잘 믿어서 그 다음을 바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욕심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속을 훤히 다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몸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맡길 수가 없겠죠. 우리를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상처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아시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청소년시절에 교회에서 연합수련회를 갔는데요.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학생들이 여름이나 겨울이 되면 연합으로 하는 대형 집회에 참석을 하죠. 이번 여름에는 우리가 자체적으로 했지만요. 저도 어릴적에 연합 수련회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번은 수련회 기도시간에 열심히 기도를 하고 이제 교회별로 모여서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교회별로 모여서 서로 동그랗게 서서 기도하고 우리 친구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이제 담당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은 은혜받아서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께서 각자 교회를 담당하시는 전도사님 목사님, 선생님을 위해 헹가래를 하라고 했습니다. 주변에 교회들이 분위기가 고조되어서 막 헹가래를 합니다. 저희도 질수가 없죠. 남자 아이들을 중심으로 저도 같이 포함해서 목사님을 둘러싸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죠. ‘굳이 안해도 된다’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너무 재밌고 좋잖아요. 그래서 ‘우와~’하는 소리와 함께 목사님을 들어서 하늘 높이 던지며 ‘목사님 사랑합니다’, ‘목사님 만세’이러면서 헹가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헹가래를 하려고 목사님을 딱 들어 던졌는데, 누군가 제 목 가까이에 있는 옷을 꽉 잡는 겁니다. 일명 ‘멱살’이라고 하죠. 그래서 ‘뭐지?’하고 딱 봤는데, 그 손을 보고 팔을 보고 쭉 따라가니까 헹가래를 받고 있는 목사님의 왼 손이었던 겁니다. 학생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못한 목사님의 불안함과 두려운 마지막 지푸라기였습니다. 자신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고 간절히 붙잡았던 제 옷이었습니다.
저도 우리 학생들이 제게 헹가래를 해준다고 하면 좋긴 하겠지만 상당히 불안할 것입니다. 준우, 준영, 영찬이처럼 튼튼한 아이들만 있으면 좀 몸을 맡기겠지만 승찬이 같은 아이들만 있으면 불안할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떠실까요? 예수님도 물론 헹가래를 받으시면 좋으시겠죠. 베드로처럼 그물을 긷는 일근육으로 다져진 팔근육으로 예수님을 든다면 안전하고 재밌었을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예수님이 베드로보다 더 덩치가 컸다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덩치가 있던 베드로도 예수님 앞에 아무말도 못했던 거죠. 베드로가 뭔가 잘못을 하면 예수님이 옆에서 ‘어허!’ 한마디 하시면 베드로도 꼼짝 못하는 포스가 예수님에게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박수에 휘둘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그래 내 인기가 이정도는 되야지’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박수칠수록 자신은 그 자리를 떠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눈물 흘리며 소리칠수록 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했다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이 자리에 서서 저는 뭔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저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저도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꾸 감추게 되고 가면만 두꺼워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도 누가 저를 좋다고 하고 칭찬해주고 하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그런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속을 훤히 아셨던 것처럼 제 속을 훤히 아셨을 겁니다. 제가 전도사로 살아가지만 마음 속에서 생겨나고 바라는 것들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라는 것들이 무엇인지 저를 다 아실 겁니다.
저희 집에 25개월짜리 아들이 있는데요. 이 아이는 제가 집에 들어가면 인사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 손에 무언가 들려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뛰어나와서 ‘아빠 그거 뭐야? 우리 한번 볼까?’이렇게 반깁니다. 저를 반기는게 아니고 제가 사온 것을 반깁니다. 맛있는걸 먹기를 기대하는거죠. 우리의 모습도 이런 것 같아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좋아하는거죠.
또 이 아들이요. 요즘 엄마아빠를 막 때리거든요. 기분이 좋거나 장난칠 때나 화가 날 때 막 때리고 집어 던지고 깨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이 조절이 안되서 때리거나 소리지르는 것으로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가르쳐주죠. ‘요한아 아빠를 때리면 안돼, 그건 잘못된거야, 물건을 던지면 안돼, 친구한테도 던지면 안돼’이렇게 가르쳐주죠.
근데 아무리 25개월밖에 안된 아이라도 그 아이한테 뺨을 한 대 맞으면요 엄청 아픕니다. 한번도 맞아본 적 없는 뺨을 자식에게 맞는 배신감과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책을 던지면 그 모서리에 제 발이나 이마를 맞고 소리를 안 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가나고 이 자식을 때려서 혼내야하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만번이라도 알려줘야 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오래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성품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향하여 얼마나 많이 참으시고 기다리실까. 그렇게 아이가 잘못할 때마다 세워두고 가르치면 아이는 반항을 하기도 하죠. ‘아니야, 안돼, 싫어’ 이렇게 반항을 합니다. 뭘 잘못했는지 말하라고 하면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은 잘하면서 잘못했다는 말은 안 합니다. 딴청을 피우기도 하구요. 배고프다고 말하기도 하구요. 웃음으로 넘어가려고도 합니다. 인간의 죄성을 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시간 싸움을 하다보면 아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자기가 아빠를 때리고 혼자 방으로 들어가서 벌을 서기도 합니다. ‘아빠 때렸어요, 잘못했어요.’ 이렇게요. 그렇게 잘못했다고 말하면 용서해주고, ‘앞으로 그러지마, 아빠가 믿을게’라고 말해줍니다. 사실 믿는건 아니죠. 내일 또 이 아이가 제 뺨을 날릴 것을 두렵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아주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요한아 네가 아빠를 때려도 아빠는 너를 사랑해, 너가 잘못해도 아빠는 너를 사랑해’라고 사랑을 줍니다. 아들도 제게 안기며 ‘아빠 다신 안 그럴게요, 아빠 사랑해’이렇게 서로 사랑을 합니다. 이렇게 저도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가는 것 같아요. 하나님도 나에게 이러시지 ‘그래 사실 이 아이의 모습이 내가 하나님께 하는 모습이지’하며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믿는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알기 때문에 네가 또 잘못할 것을 알아, 네가 실수할 것을 알아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3장 말씀의 서론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서 거듭남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3장 16절인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할만한 것이 없는 세상이고 사랑할 수 없는 우리지만 주님은 우리의 속을 훤히 다 아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 앞에 우리가 가면 쓰지 않고, 비록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들이 아이가 아빠에게 과자만 요구하는 것들일지라도 그런 우리의 연약함까지 다 내어놓길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될지도 모르고 무엇을 믿어야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 앞에 인정함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가실 줄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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