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288 x 436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요한복음 2:13-22
1. 13절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라고 표현합니다. 유월절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이 유월절 절기의 축제가 이제는 조금 우리가 크게 지키지 않는 행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당시에 문설주에 동물의 피를 바르면 장자를 죽이지 않고 넘어갔던 사건, 'pass over'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고 있던 그 시기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제자들과 초대교인들의 인식이 담겨있습니다.
2. 본래는 가장 큰 축제였고, 유대 공동체의 감격스러운 절기로 지켰던 유월절이 상업적인 행사로 변질된 것을 예수님은 그냥 넘기실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분노가 나옵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이 말씀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에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온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여겨왔는데, 예수님이 상을 엎으시고 채찍으로 동물들을 내 쫓으시는 폭력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3. 그러나 분노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감정입니다. 사람이 분노를 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인간이 보통 화를 내는 경우는 크게는 생존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면 위협을 느꼈을 때, 좌절했을 때, 규칙을 위반했을 때로 봅니다. 아마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화를 냄으로 표출을 하는 것 같습니다.
4. 가장 공감되는 분노에 대한 분석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분노한다는 분석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원하는대로 하기 위해서 급박하게 분노라는 감정이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분노를 많이 사용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요? 화를 많이 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원래 화가 많아 잘 안 고쳐져’라고 말합니다.
5. 그리고 우리가 ‘나는 분노조절장애야’라는 말을 쓰기도 하죠. 그런데 이 분노조절 장애에 대해 재밌는 해석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요. 한 범죄심리학 교수님이 한 말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앞 차랑 시비가 붙어서 내렸는데, 마동석이 내렸다. 그럼 분노가 쏙 들어가죠? 바로 그건 장애가 아니죠. 마동석을 보고도 달려들어야 장애인 거다. 근데 내린 사람이 나보다 약해 보이거나 그래서 화를 내거나 더 덤비면 그건 장애가 아니라 폭력이다.”
6. 마동석을 보고도 화를 내야 분노조절장애라는 겁니다. 굉장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얼마전에 범죄도시 영화를 봤는데요. 마동석이 나오면 모두가 무서워하고, 마동석이 악당을 물리치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7. 그러니까 우리의 분노가 사실 타당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만 화를 냅니다. 내가 화내도 괜찮은 사람, 특히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많이 내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8.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런 감정적이거나 약자를 향한 분노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의도적으로 보이며 이성을 놓지 않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강자들을 향한 분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분노를 어떻게 사용해야되는 지도 배울 수 있는데요. 우리가 분노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유대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힘을 넣어 주는 것은 그분의 분노다. 역사에는 분노만이 홀로 악을 정복할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예언자들」, 아브라함 헤셀, 삼인, p.451
9. 하나님도 분노를 나타내신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다가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실패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만일 불의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분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에 대한 동의로 이어지고 악에 대한 수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노로 의롭지 못한 것을 향해, 죄와 악을 향해 분노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자의 선포이며 ‘거룩한 분노’입니다. 10. 당시 성전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B.C.19년에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을 위해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은 로마에게 모든 걸 바치며 에돔 출신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짓는 일을 시작합니다. 헤롯의 성전은 기원후 64년에 완성됩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됩니다.
11. 이 성전의 구조를 보면 성벽 안에 먼저 넓은 마당인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유대 공동체가 부정하게 여기는 외국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공간인 것이죠. 그리고 그 가운데에 또 벽으로 감싼 곳이 있는데요. 그곳에 들어가면 먼저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지성소 순서대로 구별되어 나뉘어져 있습니다.
12. 오늘 이야기의 배경은 가장 넓은 곳인 이방인의 뜰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예수님이 눈으로 본 것은 무엇인가요? 성전 안에서, 그 마당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13. 당시 유대 공동체 사람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와서 속죄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나라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그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먼 땅에서부터 동물들을 끌고 오려면 힘들기 때문에 성전 마당에서 여행자들을 위해 편리하게 동물들을 파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동물을 사고 그 동물을 제단으로 가져가 드리는 것입니다.
14.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세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전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세겔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주변 나라들 모두 데나리온을 사용했지만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세겔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동물을 살 때와 성전세를 낼 때 모두 데나리온에서 세겔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수수료도 내야 했습니다.
15. 수수료는 지금처럼 1.몇% 수준이 아니라 두 자리 수의 단위까지 환전비용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서 믿기지 않아 제가 감히 수치로는 정확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렵겠지만요. 상당한 돈을 거의 착취하다시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환전 비용과 장사 비용을 누가 가져가나요? 성전에서 가져갑니다.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16. 그 성전의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 그 돈들을 다 쏟아 엎으신 겁니다. 또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들을 성 밖으로 다 쫓아내십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온 맘몬을 쫓아내십니다. 은근슬쩍 들어온 돈의 가치를 무너뜨리시는 예수님의 분노입니다. 17.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건 가톨릭의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며 돈으로 구원열차 티켓을 팔았습니다.
18.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진지 2000년이 지나고 부패한 교회 속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난 지금의 교회의 모습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부유해지면서 맘몬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의 횡령과 안 좋은 소식들은 우리를 마음 아프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말하기에 부끄러워졌습니다. 19. 교회가 본질을 잃고, 보이는 교회와 보이는 물질을 위해 열심일 때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20. 참된 성전을 위한 열심히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성전 즉 물질로서의 성전을 위해 열심을 낼 때 그것이 우리를 삼키고 진정으로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삼킬 것입니다. 헛된 가치를 위한 열심히 정말로 중요한 본질을 잊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열심을 내고 있는지, 외형적인 교회와 세상의 기준들에 부합하기 위한 열심을 내고 있는지,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열심은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지워버릴 것입니다.
21. 예수님께서 다 엎으신 현장을 보고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22. 유대인들은 또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당신이 뭔데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그럼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이 성전은 46년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 일으키겠느냐” 24. 여기서 ‘헐라’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루사테’라고 합니다. 건물을 허는 것과 사람의 신체를 죽이는 데에 모두 사용한 단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인 성전을 허문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성전인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건물의 성전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성전에 다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지었다가 무너진 성전, 그리고 이제 다시 짓는 성전이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성전을 우상화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25. 예수님은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죽여라, 그러면 내가 3일 만에 다시 일으켜 질 것이다. 살아날 것이다.” 라는 기적입니다. 유대인들이 기적을 구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기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상에서의 목표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일으킴을 받는 기적 밖에 없었습니다.
26. 제자들도 그때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본 후 그리고 기원 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기록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한 것입니다. 27.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참된 성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보이는 성전을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로 만든 성전으로부터 돈을 얻어내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장소가 타락했습니다.
28. 성전 밖은 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은 다 그렇다고 해도 성전만큼은 세속적 가치에 물들이지 않고, 물질을 위한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세상에서 미련해 보이는 방법일지라도 생명을 살리고 약한 자들을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하는데, 자꾸 우리의 교회들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일에 재정을 사용하기 보다 많은 비율이 교회의 살을 찌우는 일에 쓰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29. 순수한 마음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었지만 한국교회에 대해 깊이 들어가 알아갈수록 실망스럽고 화가 나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곳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회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30. 예루살렘 성전은 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물이 없을 때 참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고 예배하는 교회들이 살아나고 온전히 따랐던 초대교회였습니다. 31. 고린도후서 10장 5절의 말씀처럼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32. 우리가 교회에서 바라야 할 것은 예수를 통한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얻는 경제적 이익과 세상적 가치의 성취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께서 허물어지시고 다시 일으키심을 받은 사건, 예수와 함께 나도 허물어지고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움을 받는 참된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33. 우리 안에 세워진 헛된 성전을 무너뜨리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세우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나가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
주님을 나의 참된 성전으로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허무한 가치들로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게 하시고,
주님 없는 성전 짓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를 주님의 처소 삼아 주옵소서.
주님의 뜻이 아닌 것들은 모두 허물어 주시고,
오직 주님의 거룩함만 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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