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면서 순교자주일입니다. 순교는 우리와 먼 옛 이야기가 된 것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중국과 중동지역에서, 이슬람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추방을 당하거나 징계를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사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1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빠르게 부흥과 성장을 이룬 나라입니다.
2. 그 중에 첫 여성 선교사인 김순호 선교사님이 계셨는데요. 첫 선교사라고 하는 수식어가 다를 수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파송한 선교사인 것은 사실입니다. 1930년에 장로회총회 여전도회가 김순호 선교사를 중국으로 파송을 했습니다. 그를 선교사로 파송한 이유에 대한 자료를 보면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선교의 사명과 능력, 인품이 양호하고 게다가 그가 불 같은 신앙의 열정과 강력한 애국심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3.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선교사로 지원을 하고 3년동안은 어학 공부에 전념합니다. 당시 총회 선교 사업비 총액은 1,130원이었는데요. 김순호 선교사님에게 지원한 금액은 630원이었습니다. 절반이상을 김순호선교사님에게 지원한 셈입니다.
4. 김순호 선교사님은 중국 산동성에 거주하면서 각지에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부녀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와 언어를 가르치며 사역을 했습니다. 17지역을 순방하며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고 불신자들을 변화시켰고, 그녀를 모두가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가지며 한국에서 선교 보고를 하며 지내다가 1937년에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6년간의 선교사역을 더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5. 그러나 그의 사역에 대한 평가는 여성의 선교사역의 길을 열어준 길이 되었고 큰 성과가 되었습니다. 모든 여성 신학자들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김순호 선교사님의 해외 선교의 개척에 대해 그의 제자들은
“한국의 여성이 대국이라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됨으로써 한국 교회 여성 역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6. 그 이후 만주에서 사역을 하다가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신학교 교수로 복무하다가 신의주 제2교회로 부임하였고, 월남 제안을 거절한 채 복음과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어느 날 새벽기도 중 교회로 몰려든 공산 폭도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7. 여성으로써 하기 힘든 선교사역을 감당한 그는 한국교회의 커다란 역사가 되었고, 통로가 되었으며 그의 희생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는 모델로 본이 되는 다리가 되어주셨습니다.
8.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빌립과 나다나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이 먼저 예수님을 만납니다. “빌립아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부르심은 때때로 조건없는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주권 안에 사로잡힘을 잡은 자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9. 빌립은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내가 모세가 예언한 그 분을 만났다. 나사렛 출신인데 예수님이다. 나다나엘이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봐라” ‘와서 보라’라는 표현을 씁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에 나오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10.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가짜 이스라엘도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이름은 야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죠? 그런데 그 야곱의 이름 뜻이 무엇인가요?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형 에서를 속였던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었는데. 나다나엘은 거짓이 없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뜻 답게 늘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11. 늘 진리를 알고자 애썼고, 하나님의 아들을 구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다음 말에서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12. 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은 관용적인 표현인데요. 열왕기상 4장 25절, 스가랴 3:10, 미가 4:4에서 평화로운 상태를 나타냅니다. ‘무화과나무아래에 있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평화를 상징하고 열매가 잘 자라고 전쟁이 없이 평안하게 지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13. 나다나엘이 ‘거짓이 없는 자’라는 것은 농민으로서 자기의 땅을 경작해서 정직하게 소출을 얻는 자입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의 고백들을 봤을 때 자신의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자로서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가지고 정직하게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14.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이루어가는 자는 자신의 무화과나무 아래서, 자신의 일상을 충실히,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은 당연한 것이구요. 나다나엘의 삶은 자신의 매일매일을 충실히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구도자였습니다.
15.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것가지고 놀라느냐 너는 더 큰 일도 볼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6.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은 ‘아멘 아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재현시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돌베게를 베고 잘 때 꿈 속에서 보았던 이야기입니다.
17. 예수님 위로 사다리가 놓이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속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나다나엘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가 하는 일을 볼 것이다. 하늘과 인자 사이에 교통하는 것, 상호교류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이 내 일이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 나는 그것을 위해 파송 받았다.
18.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송을 받아서 이 땅에 오시고 단절되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분입니다. 다리가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다리를 놓는 분이시자 직접 다리가 되어주신 분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우리는 그 다리가 되어주신 우리를 하늘로 가게끔 또는 하나님이 내려오실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인간은 왕래할 수 있습니다.
19. 다른 이들과는 관계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두 존재는 서로 교류할 수 있으며 서로만 관계할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가 자신을 이 세상에 내어 주셨기 때문에 그 희생과 사랑의 길이 열렸습니다.
20. 이 세 위격은 서로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흘러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분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저한테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누가 먼저였는지도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세분은 같이 존재했으며 영원히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1.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무엇인가를 완전히 파악했다면, 그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에 대해 파악하려고 해서 노력해서 ‘하나님은 이렇다’라고 단정 짓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22. 그래서 또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가 셋과 같다거나 셋이 하나와 같다는 식의 숫자 놀음으로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는 산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께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방식이다”(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양혜원·박세혁 옮김, IVP, 2010, p.302)
23. 우리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차원이 4차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우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차원을 뛰어넘는 분이시고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들, 인간의 눈높이에서 이해할만한 것들을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충분하게, 온전하게 희미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4. 또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고 이 우주 속에 캄캄한 우주속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좋으실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수많은 시간과 환경들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을 먼저 만들지 않으신 이유가 인간을 먼저 만들면 인간은 바로 죽기 때문입니다.
25. 빛을 만들고 해와 달과 땅과 바다와 식물들과 동물들을 만드신 후에 인간들이 살아갈 터전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관계 속에서 모든 생명들이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위대할지라도 식물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26. 하나님의 속성도 이렇듯 관계적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관계로서 존재하신 분들입니다. 한분이시지만 하나로만 계시지 않으시고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으로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처음부터 관계성을 가지고 관계의 형태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상호작용하시고 서로 회의하시고 상호 교류하시고, 상호 내주하시고, 상호 침투하시고, 상호사랑 하십니다. 서로 얽혀서 교류와 관계와 사랑을 하시는 그 관계성이 성삼위하나님의 본성입니다.
27.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못견뎌하시고 평화가 깨지는 것을 참지 못하십니다. 이들의 서로 사랑하심은 자기들끼리만 꽁꽁 갇혀있지 않으시고 그 사랑이 흘러서 예수를 파송함으로 인간과 화해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셨고, 자신들이 희생하면서까지 인간과의 화해, 피조물들과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성삼위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28.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도 관계적 속성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관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생 자체가 관계적이구요. 관계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셔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 공동체와 이웃들에게 사랑의 관계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29.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던 “네가 더 큰 일을 볼 것이다”라고 하셨던 그 큰일,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랑, 직접 다리가 되셔서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가 되신 사랑의 큰 일. 그것을 회복하고 우리 또한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잇는, 하나님과 그 타인의 사이를 잇는 존재, 사람과 사람의 갈등을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시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