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주일저녁예배

사마리아에 가신 예수

E.step 2023. 2. 12. 22:17
728x90
구에르치노(Guercino, 1591~1666)가 그린 <예수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Jesus and the Samaritan Woman at the Well, 1640-1641)

요한복음 4:1-15
예수님은 제자 삼는 것에 큰 중점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를 양성하는 것에 큰 비중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많은 제자를 삼고 더 많이 세례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이 많이 퍼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듣기에 세례 요한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고, 예수님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세례를 베푸시기보다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제자들과 같이 세례를 베푸셨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일을 나눠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례 운동의 활동을 제자들에게도 부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십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주요 도시를 떠나 북쪽 외곽으로 이동을 하십니다. 그래서 아마 이 때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처형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세례 요한이 처형을 당하자 예수님도 자신이 눈에 띄는 것을 피하시고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나십니다. 유대지역은 중심도시이고 정치적으로도 위험하고 감시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피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북쪽에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하시는데요. 4절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특별히 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길도 좋지 않은데 예수님은 특별하게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남쪽에 있는 유대지역에서 북쪽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사해에서부터 갈릴리바다까지 이어지는 협곡을 지나갔습니다.

산을 옆에 두고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면 쭉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왕의 대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도로는 유료도로이며 에돔 왕이 건설한 도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방법은 해안길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지중해 해안을 따라 해변길을 걸어가면 산악지역이 아니더라도 조금은 완만하게 북쪽 지역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산악지형으로 이동하는 길인데요. 예루살렘에서 벧엘 세겜,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 지역으로 가는 내륙 산길이었습니다. 흔히 족장들이 다닌 길이라고 해서 ‘족장로’라고 불렸습니다. 이 족장로는 해발 600미터 전후의 산등성이 길을 상당히 걸어야 했습니다. 이 길은 굉장히 험한 길이어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습니다. 주로 웬만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 요단강을 따라 왕의 대로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지역으로 갈 때 빠르지만 험한 산 길을 선택하지 않고 조금은 완만한 길을 선택한 이유는 지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빠른 길이지만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는 그 길로 가지 않은 이유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길고 긴 분단과 갈등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을 갈 때에도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을 막거나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목이 말라도 물 한 잔 얻어 마실 수 없는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와 사마리아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주전 921년부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지속적인 갈등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전 721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할 때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열왕기하 17장이 기록하듯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고 민족성이 희석된 곳이 되었습니다. 앗수르의 언어와 문화 등은 물론이고 그들의 종교들도 다 가지고 들어와 거주하며 사마리아 지역을 작은 앗수르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종교적, 인종적 혼합이 일어났구요. 이제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아닌 혼혈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더렵혀지고 오염된 땅이라는 편견을 얻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관계는 원래 좋지 않았지만 주전 450년경인 에스라-느헤미야시대에 더 악화됩니다. 에스라-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보냄을 받아 무너진 성벽중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이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 제안이 거절당하자 산발랏은 에스라 느헤미야를 음해하고 성벽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산발랏은 ‘달의 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종교적 혼합과 변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나누어진 이후로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워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전 128년경 히르카누스 1세왕이 그리심산 성전을 공격하고 파괴하며 강제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심산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북왕국 후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는 것처럼 남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향해 단죄적이었으며 그 갈등의 골이 깊었습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보면 예루살렘이 중심이지만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졌을 당시 사마리아에도 성전을 세워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북쪽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땅이 하나가 되자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을 이은 가장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전국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지만 배척을 당해왔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유대지방의 지주들 중에는 갈릴리 곡창지대에 땅을 가진 지주들도 있었기에 갈릴리는 여전히 유대에 속했고, ‘사마리아’만 산 위에 고립된 지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리십니다. 이른 아침 출발해서 사마리아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야곱이 물을 마시던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 사마리아를 지나다니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53절에서도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화내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해가 아주 높은 시간,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는데요.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시더니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곳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갔기 때문에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이 질문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들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깊은 갈등의 관계이기 때문이며, 특히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배척하고, 상종하지 않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마음은 이것이겠죠.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오지도 않거니와 말도 섞지 않는데, 당신은 왜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까?

당시는 남성중심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에게 공공연히 말을 건다는 것은 의심받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자유분방함으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그 사이의 평화를 이루시려는 시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과 상종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 여행 중인 사람에게 냉수 한그릇을 제공하는 것이 큰 환대인 것을 생각하시고 환대를 요청하십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뜨거운 정오의 우물가에 오는 여인의 특수함을 아시고 예수님은 경계를 넘어설 기회를 엿보십니다. 일상적인 대화의 장을 여셨던 예수님과 사마리아인의 대화는 단순한 대화를 넘어서 고차원적이고 신성한 주제로 넘어갑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한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 지 모르고 그저 한 사람의 유대인 남성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무슨 의미로 말하고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나는 생리적 갈증을 느끼고 있지만, 너는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 ‘물 좀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낮 12시에 물을 길러 오는 너의 인생 자체가 목마르다. 네 몸짓, 음성, 눈빛 모두가 말한다. 목이 마르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너가 그것을 알고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내게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은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이신지 금세 알아차립니다. 내가 대화하는 이 분은 그냥 유대인 남성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대한 인식이 달라진 여인은 호칭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당신’이라고 부르더니 11절에서부터는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남성을 향해 조금 더 존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주여, 주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생수’는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곧 생수입니다. 요한복음 7:37에서도 생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또한 이사야 55:1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은 누구든지 와서 마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생수와 선물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메타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의 생수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생수를 심층수로만 이해하는 여인은 또 질문합니다. 선생님께서 야곱보다 더 크십니까? 이 물은 야곱 때부터 사용되던 깊은 우물입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러자 여인이 말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여인은 아직도 생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수고로운 노동을 그만하게 해달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마술적인 물을 원합니다. 아마 이 여인은 삶이 너무 고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피적인 구원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생수는 마술과 같은 신비한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생수는 성령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유지시키는 충만입니다. 성령의 생수는 여전히 갈증을 남겨주는 생수이기 때문에 매일 마셔야 합니다. 역설이죠. 하나님에 대한 앎이 충분하지만 하나님을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더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허기를 남기는 충만입니다.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

채워야 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채우는 충만함이 참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내 안을 채우고자, 내 안에 갈증을 채우고자 자꾸 내 속에 이것도 넣어보고, 다른 것들도 넣어보고 해서 행복을 쫓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샘솟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자각하고, 그 생수를 구하는 자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며 충만해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와서 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적대적 관계였던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찾아가셔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데요. 그 하나님의 선물을 누구에게 주셨냐는 것입니다. 고립되어 불결하게 여겨지던 땅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그 곳에도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주셨던 예수님, 적대적 관계여서 제자들도 불을 내리자고 했던 사마리아 땅에 경계를 넘어 들어가 경계를 허무셨던 예수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생수, 선물을 구하는 자들이라면, 그 물을 나의 육적인 갈증을 채우는데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닌 내 경계 너머에 있는 자들에게 물을 떠다 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728x90

'하늘뜻펴기 > 주일저녁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식의 의미  (1) 2023.05.12
내가 그라  (0) 2023.03.17
위로부터 오시는 이  (0) 2023.02.01
흥하십시오.  (2) 2022.12.22
이처럼 사랑하사  (3) 202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