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새벽

친구처럼

E.step 2024. 6. 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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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7-17
찬송가 434장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방향은 무엇인지 그것에 맞추어 있는 것입니다.
 
기타를 연주하다가 음이 안 맞으면 조율을 합니다. 기타 줄 중에서 가장 두꺼운 음은 ‘미’입니다. ‘미’소리가 나야 하는데 ‘미 샵’이 나거나 ‘파’ 소리가 나면 기타 6줄의 화음이 어우러지지 않습니다. ‘미’라고 하는 파동의 범위 안에 들어가야 다른 음들과 조화를 이루며 예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정확한 ‘미’ 소리로 맞추기 어려워도 ‘미’의 범위 안에 들어가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말씀의 범위 안에 들어가야 주님의 말과 우리 삶이 맞춰져서 예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말씀에서 벗어나서 소리를 내거나 주님의 파동을 벗어나서 행동하거나 말하면 조율되지 못한 음이탈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 튜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뚤어진 우리와 주님 사이를 조율해가면서 주님의 음 안에 들어가야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오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의 조율기 안에 음이 들어와 맞춰져 있을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연주는 아름다운 공연이 될 것입니다. 주님과 조율이 맞은 상태에서 연주를 해야 조화롭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과 조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마음대로 연주하면 원하는 연주를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나에게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야 우리 삶이 알맞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원하는대로 하거나 나에게 맞추어서 하거나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은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조율기 안에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할 것은 아버지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맞는지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면 그 구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맞아 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마음과 하나가 되시고 그 사랑하는 일을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고 별로 구하고 싶지도 않아서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하시는 것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이자 계명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범위 안에 조율되어져서 그 음 안에서 우리가 사랑이라는 연주를 할 때 균형있고 조화로운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더 나아가십니다. 13절에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죽으셨던 사랑이 두 분의 뜻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예수께서 행하셨던 십자가 사건은 하나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두 분의 사랑하고자 하는 뜻,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뜻이 맞아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자 사랑하셨던 두 분의 뜻이 맞아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셨던 두 분의 뜻이 맞아 그 원하는 것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다른 이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이 단어는 특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에게 ‘너는 나의 친구’ 라고 하신 것은 각별한 사이입니다.
‘친구’라고 하는 것은 각별한 사이입니다. 이런저런 대화도 다 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나를 잘 알고 내 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파가 있죠. ‘내 친구냐, 너 친구냐’ 끼리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께서 나에게 ‘나는 너의 친구다’라고 하시는 것은 ‘나는 네 편이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친구가 되지 ㅇ낳고 가이사 황제의 친구가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소리쳤습니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가이사의 ‘필로스’ 즉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버리고 가이사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 편이 되셔서 나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해 ‘주님은 제 친구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주님과 친구처럼 지내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처럼 온전한 목적을 향해 걸어가는 오늘 하루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주님과 마음이 맞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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