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새벽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E.step 2024. 5. 1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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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1-38
찬송가 337장

윤동주의 <애기의 새벽> 시가 있습니다.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저희 집 이야기 같습니다. 저에게는 아기 울음 소리가 새벽을 깨워주는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기가 울어서 새벽에 나올 때도 있습니다. 또 아기 울음 소리는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음성으로 듣기도 합니다. 아기 울음 소리를 통해 아빠로서의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요.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닭 울음 소리와도 같습니다.

오늘 오실 때 닭 울음 소리 듣고 오신 분은 없으시죠? 물론 알람 소리를 닭 소리로 하셨으면 모르겠지만요. 폰 알람 소리가 오늘 아루 새벽 예배를 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닭 울음 소리인 줄 믿습니다. 베드로에게 닭 울음 소리는 이제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36절부터 내용을 살펴보면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Domine,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는 열정이 있어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너는 아직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베드로는 어린아이이기 떄문입니다. ‘작은 자’입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하실지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하면 그대로 따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실 것인데, 죽음의 길로 들어가실 것인데 그길을 베드로가 따라오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베드로의 신앙은 어린 학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따라오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주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지만 나중에는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래 큰 소리치면 조금 불안합니다. 실제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괜히 목소리만 크게 얘기합니다. 자기는 할 수 있다고 괜히 자존심을 부립니다. 자존심인지 아니면 진짜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베드로는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그러셨는데요. 결혼하기 전에 지금의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 남편 집사님이 한강에서 뛰어내려 죽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다시 만났대요. 그리고 그 남편 집사님이 아내 집사님에게 자기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믿은 자신이 잘못이라고 합니다.

같이 살아보니 하나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도 지지 않습니다. 자존심도 세고 말도 안 듣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 남편 분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큰 소리 쳤지만 실제로는 사소한 것 하나 지지 않고 다 이깁니다. 아내를 위해 죽는 것은 사소한 말을 잘 듣고 져주는 건데 말입니다.

베드로도 비슷합니다. 주를 위해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러 갈 때 베드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보이실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를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성격과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떄문에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미리 말씀하시지만 실망스럽게 말씀하지는 않으시고 이해한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습니다. 바로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하시는 믿음입니다. 베드로가 아직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후에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될 것을 알고 계셨고,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베드로도 이제 자신의 참 제자가 되고 자신의 수제자가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를 진실되게 세우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세워 놨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요.

오랜 시간 예수님을 믿어오고 주를 위해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이 진정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큰 소리만 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만 지키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모습만 당당하게 갖추고 속 모습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를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치는 일은 큰소리 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당당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도 순교자는 적고 예수님을 부인한 신앙인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만큼 주께서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선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다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도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에 대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베드로가 그러실 줄 몰랐다면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 아끼는 제자 베드로가 나를 부인하고 떠날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를 이해하시고 나중에는 자신을 따라 주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다 아시기 때문에 기다리시고, 사랑으로 조금씩 인도해 가시면서 우리가 주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갑자기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그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닭 울음 소리만 들으면 예수님의 음성이 같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교의 길을 가기까지 새벽마다 울리는 닭 울음 소리는 베드로가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알람으로 작동했겠죠.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그것이 베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듣는 새벽을 깨우는 알람 소리가 우리를 새벽예배로 이끌고 주의 길로 이끄는 소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갑자기 뛰어난 신앙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루하루 매일 새벽을 깨우며 주의 길을 걸어가며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과 함께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며 주님을 위해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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