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수요강해

성도의 생활 원리

E.step 2024. 5. 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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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제작연도:1595년경(1594~1596年), 기법:캔버스에 유채물감, 크기:110×92㎝, 소장처: 이탈리아 로마, 바르베리니 궁


로마서 12:1-12
1) 거룩한 산 제사(1절)
오늘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성도가 하나님께 하는 것과, 둘째로 사람들에게 행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율법이나 계명, 법칙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절에 ‘권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죠. 이것은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감사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법칙이나 규칙이나 무거운 멍에에 매여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행하라는 감사의 행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권하노니’ 앞에 ‘자비하심’이 나오는데요. 이 ‘자비하심’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관심을 보여 주는 것으로 ‘긍휼’, ‘자비’, ‘동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법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듯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하지 말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전제로 행하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느끼며 그 자비로 우리도 흘러가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래야 하겠죠?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처럼 살아가면 얽매이는 것이지만 은혜로 하면 가슴 벅차고 미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느끼고 알며 생활하시기를 저도 권면 드립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권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예배에 관한 부분이고요, 그러나 예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우리 삶을 예배로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드리라’는 단어는 제의적 용어입니다. 제사를 할 때 쓰는 용어 였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소나 양 같은 ‘짐승’을 드렸지만 이제 우리는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몸’은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을 포함한 전인간을 뜻합니다. 우리의 몸과 영 전체를 말합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몸이 예배당에 와야 마음도 자꾸 생기고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 우리 자체를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 제물로 드릴 때는 그 짐승을 죽여서 드립니다.  ‘산 제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지만 우리의 생각, 우리의 자아를 죽여서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살아있지만 죽어서 바쳐진 짐승처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죽이고 바쳐야 합니다. 우리의 고집도 욕심도 다 죽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영적 예배’, 또는 ‘합당한 예배’, 입니다.

2) 변화된 삶(2절)
이어서 2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본받다’는 말의 원어는 ‘쉬스케마티조마이(συσχηματίζομαι)’인데요. 모델을 따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본 받을 모델을 보고 따라하면서 자신을 그것에 맞춰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모습이 아닌데 따라하면서 바꿔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에서 마음은 ‘생각’(누스, νοῦς)입니다. 마음은 mind라고 하고요. 곧 정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뭐든지 생각이 중요하죠. 생각, 곧 정신이 중요합니다. 정신 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하잖아요. 20세기 독일의 신학자 바르트도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란 돌이키는 생각이다.”
“곧 어떤 새로운 행함을 지시하는 돌이킴이 일어나는 자리는 돌이키는 생각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이 행동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우리의 머리 속을 말하고, 가치관과 세계관을 말합니다. 우리의 뇌는 많이 보는 것, 많이 생각하는 것으로 프레임이 짜여져 있어서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기도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뇌를 잘 만들어가야 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제물로 바쳐진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전의 생각이 죽고 거룩한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세계관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그 행위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II. 성도의 교회 생활
몸과 지체(3-5절)
3절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는 말은 교만한 생각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낫다고 여기는 교만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의 생각”은 자기 자신을 상대방보다 낫다고 여기는 ‘교만한 생각’입니다.  ‘생각’이 중요하다고 그랬죠. 이 ‘생각’을 통제하고 관리해야 주님의 몸인 지체들과 서로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카라바지오(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
이 그림은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의 나르시스입니다.  어깨 폼이 넓은 비단옷을 입고 있습니다. 옷도 고급스럽고 외모도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비친 연못을 보면서 반했습니다. 눈은 반쯤 감겨있고 입은 조금 벌어질만큼 황홀경에 빠져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끌려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입니다.

나르시스의 비극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에만 사로잡혀서 살아갔던 것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법이 없고요. 교만 속에 갇혀서 자기 파멸의 늪으로 빠져버린 것이 비극입니다. 나르시스는 바울이 말하는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것이죠. 자신에 대해 분량 넘치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에만 도취되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난 것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좋은 모습과 잘하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서로간의 교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서로 지체라고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를 섬길 때 자신의 일만 더 높다고 생각하지 말고 전체적인 한 몸으로 생각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더 좋은 기능이나 나쁜 기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기능,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고 지체가 되어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서로가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직분이 아니고요. 기능과 역할입니다. 그리고 다양성과 역할의 분담이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을 향해서 교만한 생각이 있다면,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생각을 더 키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은사와 직분(6-8절)
이러한 기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은사는 (카리스마, χάρισμα)인데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은사를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다양하게 섬기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다 있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사에 따라 주어진 자리에서 은혜대로 하는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입니다. 카리스마는 자신을 드러낼 때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해나갈 때 카리스마가 생깁니다. 자신이 힘을 세우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기능을 성실하게 해 나갈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카리스마와 같은 권위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그렇죠. 막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자신의 일만 중요한 것처럼 말하고, 자기가 높은 사람인 체 하는 사람을 보면 힘이 세보이지만 사실 사람들의 속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내려갑니다. 오히려 자신의 섬김을 묵묵하게 해 나가고 자신의 섬김보다 상대방의 섬김을 높이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권위 즉 카리스마가 올라갑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원리대로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이면 실제적인 권위는 낮아지고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십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의 권위와 카리스마가 세워집니다. 이렇게 자신의 은사에 충실할 때 우리는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이렇게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섬김으로 역할을 담당하는데요. 구체적으로는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구제’, ‘긍휼 베푸는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섬기는 일들인데요. 우리가 하는 모든 봉사와 일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하는 모든 일들입니다.
3) 여러가지 권면들(9-13절)

그래서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내용인데요. 기독교 윤리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윤리라는 말에 어색함이 있지만 기독교 윤리라는 과목도 있고, 기독교 윤리학자도 있습니다. 윤리는 기독교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기독교 안에는 윤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벤다이어그램이 있죠. 이런 구조가 옳은 건 아니지만 편의상 이렇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왼쪽에 해당하는 것이 교회이고 오른 쪽 동그라미가 세상이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윤리’입니다. 윤리는 세상과 교회의 공통점입니다. 세상에서도 하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윤리를 통해 교회로 들어옵니다.

교회 사람들이 세상을 위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 무료 급식을 하는 것,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기독교 윤리에 해당합니다. 이 윤리라는 교집합을 통해 세상은 교회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을 전도할 때 잘해주고, 먹을 것도 드리고, 그러잖아요. 윤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이러한 윤리적인 것을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데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섬김에는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위한 일과 교회를 위한 일과 서로를 위한 섬김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만일 사랑에 거짓이 있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저희 집에 아들 둘이 있는데요. 아빠로서 아들 둘을 봤을 때 가장 보기 좋을 때는 첫 번째는 잠잘 때고요. 둘째로는 서로 잘 노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서로 온 몸으로 장난도 치고요, 장난감을 같이 가지고 놀 때입니다. 만약 둘이 싸우면 이제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도 치고 제재를 가하면서 피곤하게 됩니다. 둘이 잘 지내야 아빠가 밥도 편하게 먹을 수 있죠. 그리고 어디가서도 형제끼리 잘 지내면 아버지가 좋은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이와 같습니다. 형제된 우리가 서로 우애하며 잘 지내야 아버지가 편하게 계실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로 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10절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는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먼저 인사하는 것이죠. 나이에 상관 없이 먼저 인사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더라도 어린 사람에게 먼저 인사할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만큼은 인사 받으려 하기보다 또는 인사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눈치보기보다 먼저 인사하는 것이 존경의 의미입니다. 제 자신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에서 ‘열심을 품고’는 ‘영에 있어서 끓으면서’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곧 주를 섬길 때 우리 영혼이 열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 우리가 열정으로 임해야 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는데요.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예언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미래와 희망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낯선 사람, 외지인, 어려운 이웃을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대접하고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복 주시는 일입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쓴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으로 각자의 역할로 서로를 세워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자 교회와 이웃 속에서 산 제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성경전서 새번역 (13장)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13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12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합심기도
이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몸과 영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재능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과 이웃을 섬기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각자의 역할에 성실히 임하게 하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강히 세우게 하옵소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합심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와 성도와 이웃을 섬기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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