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수요강해

언어의 온도

E.step 2023. 8. 3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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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9:1-14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1절에서도 예레미야의 번뇌와 눈물이 나옵니다. 자신의 머리가 눈물을 담는 곳이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은 수도꼭지가 되어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수도가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을 향해서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선지자는 미리 느끼는 사람입니다. 미리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아는 사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는 사람이죠. 그러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악으로 가득찬 백성을 바라보며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향해 탄식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아는 자입니다. 또한 그 말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야 하기에 화가 납니다. 답답합니다. 살갗이 벗겨진 자
 
그래서 2절에서는 차라리 광야에서 혼자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간음하는 백성, 반역한 백성을 떠나서 아무도 없는 광야에 나가 혼자 있고 싶은 상황입니다.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더러운 것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들의 악이 무엇이냐면요.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악에서 더 악으로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웃끼리 서로 속이고 형제도 속이고 비방하고 악을 행하는게 지칠 때까지 행합니다. 이러한 악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이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서로 속이고 비방하고 거짓말만하고 악에서 악으로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의 딸들입니다. 자신의 딸이니 죽일수도 없고 어떻게 처치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딸들을 녹이고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치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녹이시고 다시 새롭게 연단시키십니다. 새롭게 제련하시는 것이죠.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뜨거운 불에 녹여서 새로운 도구로 만드십니다. 그 과정은 불에 녹여지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칼을 망치로 치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시간이 지나야 우리는 비로소 다시 새 화살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둠에서 나눌 내용은 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8절에 보니까요.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딸의 혀가 죽이는 화살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혀가 죽이는 화살입니다. 맞아요. 사실 우리의 혀는 부드럽지만 거기서 쏘는 말들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 강합니다. 우리가 매를 맞으면 그 매는 상처가 아뭅니다. 그런데 말로 맞은 고통은 잘 아물지가 않습니다. 평생 남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혀는 죽이는 화살과도 같습니다.
 
언어게임
 우리가 항상 말을 조심해야되는데요.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벌하시지만 조금 이해의 측면에서 이 말을 바라본다면요.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또 다르기도 합니다. 같은 단어를 말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언어게임이라고 했는데요. 언어는 규칙이나 게임처럼 상황이나 맥락 속에서 그 의미가 확보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요.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다 각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 은혜를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고요. 변화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은 돈이 없었는데 돈이 생기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고요. 학생들은 시험을 잘 보는 것을 은혜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 은혜라는 것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정의 내리지 않으면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잘생겼다, 예쁘다
또 우리 10대 학생들에게 잘생겼다고 해보세요. 근데 어떤 아이는 ‘나는 못생겼는데 왜 잘생겼다고 하나’이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습니다. ‘나를 놀리는 건가?’이렇게 잘생겼다고 말해도 싫어하는 아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잘생겼다, ‘예쁘다’라는 말도 신중하게 해야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평소에 칭찬의 말을 많이 하셔야 돼요. 얼마나 안하면 아이들이 이렇게 반응할까요? 부모님이 사랑을 부어주시고 자존감을 높여주셔야 아이들이 부정적으로 자라지 않고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자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할 일은 독립적으로 세워가는 정서적 안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대화 할 때도 나는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과 마음 상태에 따라 또 그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상처를 주는 가해자 그리고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어요. ‘아 저는 저 사람 때문에 상처 받았어요. 저 사람 말이 너무 심해요.’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또 누군가는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해요. 그런 일들이 있어요. 누군가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해요. ‘아 저 분 때문에 상처를 받았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면 또 누군가가 이 분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힘들다고 말해요.
 
그러니 우리는 상처를 주는 가해자의 역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안 줘, 나는 말을 저렇게 안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질 태도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또는 이해하는 이성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뿌다구니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일수록 상처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있죠? 그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여립니다. 삶의 아픔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요란할수록 큰 소리를 내는 법입니다. 저 사람의 모난 행동은 빙산의 일각이죠. 이걸 우리말로 뿌다구니라고 한 대요. 뿌다구니는 커다란 돌이 땅 속에 묻혀있는데 그 중에 작은 일부만 튀어나와서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 말합니다. 어떤 사람의 모난 말과 모습은 뿌다구니입니다. 그 내면에는 더 커다란 아픔과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이런 아픔을 보는 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말을 잘 못해요. 부모로부터 좋은 말의 유산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통으로 유명한 강사인 김창옥 강사는 이런 말을 해요. “만약 부모에게서 좋은 언어를 상속받지 못했다면 신앙의 언어로 다시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언어가 뭘까요? 하나님의 언어죠. 이것은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말 하실까? 하나님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말씀하실까? 이렇게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에게 언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언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말, 공감하는 말, 마음이 넉넉지 못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똑같이 쏘아대는 말이 아니라 신앙의 언어로 그 사람을 재해석 할 수 있는 언어가 우리 입에서 나오면 좋겠습니다.
 
언어의 온도,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
 <언어의 온도>에 첫 장을 보면요. 이 작가가 2호선을 타고 가고 있는데요. 맞은 편에 할머니와 손자가 앉아 있었어요.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어요. 할머니가 손자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합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그러자 손자는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합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그러자 이 작가는 할머니가 할 말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뻔한 말이었겠죠?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라거나 ‘할머니는 다 알지’ 등과 같은 말이었죠. 여러분들은 이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이 문장에서 저는 갑자기 울컥했어요. 그냥 생각 없이 읽고 있었는데 이 문장을 만나자 갑자기 훅 올라왔어요. 할머니의 인생이 녹아진 명문입니다. 맞아요.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요.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를 압니다. 우리도 이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마음, 그 아픔을 충분히 담아내는 마음의 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피아노)
저도 이곳에 와서 처음에 마음이 어려운 분이 계셨어요. ‘저 분은 왜 나에게 말씀을 저렇게 하실까?’ 불편하고 상처가 되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 분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기도도 하면서 그러자 그 분이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상처도 많으신 분이고, 표현을 잘 못하시는구나, 부끄러움도 많으시구나, 이런 것을 느꼈어요. 잘 하시려고 그러는거구나, 잘 하시려고 하는건데 말하는 방식이 조금 서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나서 저도 그분의 말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좋은 의도로 받아들이고 그 마음의 목적을 보게 되니까요. 편해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보는 힘이 생기고 그 아픔을 이해하는 자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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