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5-37
1. 1890년에 그린 빈센트 반고흐의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림의 기법이 입체감과 생동감이 있죠. 전체적으로 노랑색을 띄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이 듭니다. 노란색은 우리에게 다가가기 좋은 색으로 다가옵니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 차는 모두 다 노란색이에요. 저도 요즘 아침마다 첫째 아이 옷을 입히는데 노란색을 많이 입히게 되더라고요. 노란색이 예뻐서 눈이 자주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을 노란색조로 표현한 것은 안정적이고 차분한 색채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것에 비해 뒷배경은 강한 터치로 그렸습니다. 소용돌이치는듯한 터치로 긴장감과 위급함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 중앙에는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 피습 당한 유대인을 나귀에 싣는 장면입니다. 그림 중앙에 두 사람이 돋보이지만 왼쪽에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저 멀리 가는 한 제사장과 지금 막 강도만난 유대인을 지나친 레위인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라 불리는 종교지도자들은 다친 사람을 만났지만 도와주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법을 잘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3. 시체를 만지면 이레동안 부정하다(민19:11)는 규례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지나칩니다. 자신들이 종교적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누구보다 규례를 잘 지키기 위해 살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원칙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잃은 채 생명없이 살아가는 기계적 삶의 모습입니다.
4. 고흐는 원래 성경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 프로방스의 생레미 요양원에서 지낼 때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든 때였다고 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치료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고흐를 보살펴준 사람이 있는데 조셉 롤랭과 그의 부인입니다. 그들이 보호자를 대신해서 그들을 보살펴주었다고 합니다.
5. 두 부부의 보살핌이 “무엇보다 내게 위안이 되었다”(1889.5.19.)고 고흐의 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흐는 입원해 있으면서 자신을 버티게해 준 것이 있는데 자기가 존경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그리면서 버텼습니다. 네덜란드의 대표적 화가인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성경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사람으로 유명한데요. 그의 작품을 많이 모사하면서 힘든 시기들을 이겨냈습니다.
6. 사실 이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거의 비슷합니다. 누구의 그림을 모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그가 기독교 화가들의 성경에 나온 그림을 따라 그리며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서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가 남긴 기록에는요. “딱딱한 껍질 속에 숨어있는 쌉쌀한 과육과도 같은 그리스도가 주는 위안”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7. 오늘 성경의 이야기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에 우리 자신을 적용시켜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나 자신을 이입해볼 수 있고요,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그리고 강도만난 유대인을 우리 자신으로 투사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다채롭게 우리 삶에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강도만난 사람에 집중을 해보겠습니다.
8. 고흐도 그림의 주인공을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이 강도만난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흐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투영시켜서 예수님의 치유를 받고자 하는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그림에 나오듯이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은 굉장히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부축을 받고 있는 강도만난 사람은 왜소하고 얼굴도 혼수상태에 빠진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고흐는 자기 자신이 강도만난 사람과 같은 상황인 것 같다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안동대학교 미술학과 서성록 교수 “강도만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구조자에게 매달리는 것뿐이다.”
9. 목회데이터 연구소에서 통계를 낸 것이 있는데요. <한국인이 느끼는 고립감은 어느 정도일까?>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고립감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질문을 한 결과 ‘나와 같이 있어 줄 사람이 부족하다’, ‘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 남겨진 것 같다고 느껴진다’ 등에 대해 30%이상의 동의율을 보였습니다. 한국인 3명 중 1명 이상이 고립감 속에 있는 것입니다.
10. 게다가 4명 중 1명은 외로움에 대한 의료적 치료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21년 고독사는 하루 평균 9명꼴로 역대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남성이 84%로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11. 그런데요 종교인이 무종교인보다는 고립감을 덜 느낀다고 합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10% 이하의 차이로 종교인은 ‘나는 주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고 느껴진다’라고 말하고요.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인 4명 중 3명이 ‘종교가 외로움 극복에 도움 준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74%가 ‘신앙이 외로움 극복에 도움을 준다’라는 것이죠.
12. 그러면서 ‘외로움 극복에 대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요?’를 물었을 때 절반이 ‘영적 회복’을 꼽았습니다.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개인의 영적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성도가 함께 교제하는 것도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외로움에서 이겨낼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카메라 3번]
13. 제게 자주 고민상담을 하는 아이가 있는데요. 그 아이는 교회 와서 기도하고 제게 고민상담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는 말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 마음이 정말 평안해져요’라고 합니다. 제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교회에 와서 오늘 속상했던 일, 힘든 일, 스트레스 받은 일을 하나님께 말하며 기도하는 그 시간이 참 좋다라는 것입니다. 영적 회복이죠.
14.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와 교제가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가장 우선적으로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외로움과 상처와 고통들이 해결되어야 가장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됩니다. 인간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들을 찾게 됩니다.
15. 오늘 본문 다음 말씀인 38-42절은 마르다와 마리아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열심히 준비하고 일을 하고 섬기는 마르다와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다를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분주하고 욕심 많은 마음을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 분과 깊이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 하나님과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17.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해준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보혈로 부으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한 치유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이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해 주옵소서.
18. 어쩌면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우리의 아픔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아픔을 깊이 위로하기 어렵고 자신의 할 일이 많아 그냥 한 번 보고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아시고 근본적인 치료를 해주시고 근본적인 영적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19. 우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고 상처 받으시고 쓰러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위로해주시고 회복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20. 오늘 본문 27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사실 이 말씀은 이웃에 대한 말씀이고 모둠에서 나누실 때도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하셔야하지만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으로 가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함 없이 이웃 사랑은 없습니다. 이웃사랑도 곧 하나님 사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중심이 먼저 하나님과의 사랑의 회복이 있어야 그 충만함으로 이웃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내 자아가 자립하지 못하고 건강히 서지 못하면 다른 이를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그릇이 하나님께서 따라주시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내 마음의 그릇에 있는 사랑을 다른 이에게 따라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셔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유대인을 치료해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옵소서. 상처가 회복되고 닫힌 마음이 열려 사랑하는 자 되게 해주옵소서. 하나님과의 영적 회복이 먼저 일어나게 해주옵소서. 다같이 합심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상처가 나고 쓰러진 우리 영혼에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주님의 보혈로 새롭게 해주옵소서. 주님의 자비로 연약한 우리를 돌보아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해져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 은혜를 나누는 자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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