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11-32
1. 렘브란트의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입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 화가인데요. 20대 중반에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아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경매중독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제 없이 돈을 썼고, 공식적 파산 선고 이후에는 채무 때문에 자신의 그림을 마음대로 팔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 렘브란트는 자신의 초상화를 왜 이렇게 그렸을까
2. 이 그림을 보면 부유한 귀족 출신인 아내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히고 술잔을 들어 권하고 있는 렘브란트는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만족한 표정입니다. 젊어서 성공을 한 것을 과시하는 듯 합니다. 자신과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저런 모습을 그렸다는 것은 사치를 플렉스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내면의 갈등은 전혀 없어보이고요. 술에 잔뜩 취해 눈이 풀려있습니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경멸하는 어조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줄 아쇼?”“ 헨리나우웬, <탕자의 귀향>, p.54 즐거워 보입니다.
3. 그런데 그의 성공과 명성과 부는 금세 지나가고 재난이 닥쳐왔는데요. 1635년 아들 룸바르투스가 숨졌고 3년 뒤에는 장녀 코르넬리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640년 다시 둘째딸 코르넬리아를 잃었고 1642년에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모했던 아내 사스키아까지 앞세웠습니다. 렘브란트 곁에 남은 건 고작 생후 9개월 된 어린 아들 티투스뿐이었습니다.
3. 남은 아들의 유모와 불행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정신병원에 감금시키기도 했고요. 헨드리키예와 교제를 하고 두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죽고 딸만 살았습니다. 그러는동안 화가로서의 평판은 추락했습니다. 재정 문제는 날로 심각해져서 부동산과 재물을 처분해서 빚을 갚았고요. 자신의 작품과 저택은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4. 젊었을 때의 사치와 화려함은 사라지고 돌아온 탕자처럼 헐렁한 옷과 샌들 하나 남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겪고 난 50이 돼서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립니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데요. 렘브란트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5. 먼저 둘째 아들을 보겠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옷은 다 헤어졌고요. 굽이치는 머리칼은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마치 죄수의 머리와 같습니다. 감옥이든, 군대든, 집단 수용소든, 머리칼이 잘려나갔다는 건 개개인을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발 한쪽은 낡아서 다 뜯어졌습니다. 그가 겪었던 여정이 얼마나 고됐는지 볼 수 있습니다. 왼쪽 발바닥에는 상처도 나 있습니다.
6. 오른쪽 허리춤에는 단칼이 있습니다. 이 칼은 비록 거지꼴을 하고 부랑자 신세가 되어 돌아왔을망정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들’이라는 신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탕자의 마음가짐이 고향을 향해 발길을 돌리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7. 중동을 연구하는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는 15년동안 모로코에서 인도까지, 터키부터 수단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인물들에게 아버지가 아직 정정하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유산을 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대답은 모두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똑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그런 요구를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겠지요.”
“어째서죠?”
“아버지가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니까요.”
8. 그만큼 둘째 아들의 유산 요구는 생각없는 아들의 말이고 아버지를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제 먼 나라로 가출까지 합니다. 13절에 나오는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젊은이의 욕구가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온 터전과 사고방식, 전통과 신성한 가치들을 모두 버리는 배신 행위입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합니다.
9. 남의 집에 들어가 돼지 치는 일을 하고 그 곳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먹을 수 없습니다. 저도 쥐엄 열매를 보고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데요. 똥 냄새가 납니다. 그만큼 탕자는 모든 것을 잃은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밑바닥 인생에 처하다보니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자신에게 남은 일이라곤 죽음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가장 원초적인 자신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아마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10. 헨리 나우웬은 이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돌이켜보면,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p.83
11. 이제 둘째 아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상황에서 본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고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12. 큰 아들을 보겠습니다. 큰 아들의 그림을 보면요. 아버지와 아들이 안고있는데 옆에서 뻣뻣하게 서 있습니다. 손에서 바닥까지 세워진 지팡이는 지팡이처럼 완고한 그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큰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닮았습니다. 얼굴과 수염도 닮았고요. 빨간 망토도 같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큰 아들은 이미 같은 위치에 있으며 같은 것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 이미 아버지와 같은 위치이고 같은 것을 다 가진 큰 아들이지만 그 역시도 탕자처럼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성실하게 아버지의 일을 하지만 그의 마음 속도 둘째 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본문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자들의 비유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둘째 아들만 탕자가 아니라 첫재 아들도 내적 방황을 하는 탕자이기 때문입니다.
14. 큰 아들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조심해야될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있는데 왜 너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라는 평가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자세입니다. 성경의 본문은 돌아온 탕자가 주인공이지만 더 날카로운 말씀은 큰 아들에게 향합니다. 왜냐하면 큰 아들은 바리새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15. 죄인들을 품지 않는 바리새인, 이방인과 연약한자들, 문제있는 자들을 품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기존의 체계에 엄격하게 참여하는 사람일수록 생기는 그림자는 자기의 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교제하기 보다는 계산적이 되고요. 걸핏하면 넘겨짚습니다. 신뢰는 없고 별것 아닌 말도 낱낱이 분석합니다.
16. 그래서 첫째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 것’, 네 것‘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선물 받았다고 여기는 반응인데요. 이 감사 또한 삶으로 실현해야 할 훈련입니다. 감사 또한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큰 아들의 모습이 있다면 필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17.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가장 밝은 빛을 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을 대조적으로 표현하는 화가인데요. 아버지의 얼굴이 가장 밝게 나와있습니다. 빛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눈을 보면요. 초점이 없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동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눈입니다.
18.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데요. 이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떤 일을 하다 왔는지 보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받아들이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육신의 눈을 감으니 내면의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평온함이 생기고요. 오히려 더 멀리, 더 넓게 아들을 바라보게 되는 영원한 시선이 됩니다.
19. 눈을 감으니 아들이 겪었을 아픔을 보게 되고요. 더 온 몸으로 아들을 안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데요.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내세우시는 권위가 있다면 측은히 여기는 권위가 전부입니다.” 헨리나우웬, <탕자의 귀향> p.150 아버지의 권위는 긍휼함에서 나옵니다.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언제나 품어주는 여유에서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20.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이고 아마존에서 1위를 했던 셰팔리 차바리의 깨어있는 부모에 보면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과 낡은 패턴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받아들이는 여정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가 원하는 것을 아이에게 그대로 시키는 것이 아닌 아이를 통해 나 자신을 보고 나 자신의 연약한 모습이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부모 자신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가는 성장 과정이 부모가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21.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품어줍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아들을 용서하고 환대함으로 더
감동적인 삶을 펼쳐 나갑니다. 아버지의 손을 보겠습니다. 오른 손은 부드러운 손이고요. 왼 손은 거친 손입니다. 부드러운 오른 손은 아들을 품어주는 손이고, 거친 왼 손은 삶을 헤쳐나가라는 힘과 소망을 북돋는 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 가지를 다 주고 있습니다. 험난한 이 세상을 이겨 나가라는 마음과 나는 언제나 널 부드럽게 품어줄 것이다 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22. 우리가 세 인물을 살펴봤습니다.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아버지를 배신하며 죄를 짓다가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큰 아들 또한 모범적인 사람 같지만 그 안에는 질투와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두 아들에게는 나아갈 길이 있는데 바로 아버지의 품입니다. 죄를 지은 탕자도 아버지에게로 돌아아고, 질투와 자기 의로 가득 찬 큰 아들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임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3. 그리고 결국 우리가 가야할 위치는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들들의 모습이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아버지가 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처럼 되기 위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아들들의 연약한 모습에서 아버지께로 다시 나아갔다면 이제 우리도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4. 다른 이들을 품는 사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충만해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을 언제든 다시 품어주고 축복하고 다시 얻은 이 자녀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잔치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들에서 아버지로 되어가는 신앙의 성장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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