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새벽

하늘을 우러러

E.step 2024. 8. 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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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1-5
찬송가 442장
 
17장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이라 특별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생각이 많을 때에도 이 예수님의 기도를 읽으며 기도하면 우리의 본질과 마음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신다는 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소망을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내신 분을 바라보며, 자신이 왔던 곳을 바라보며 목적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정체성을 다시 상기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라볼 것이 있다는 것은 나아갈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가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하루에 세 번만 하늘을 봐도 우울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23편에서도 자비를 비는 기도가 나옵니다. 거기서 1절에 보면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
상전의 손을 살피는 종의 눈처럼, 여주인의 손을 살피는 몸종의 눈처럼, 우리의 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원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우러러 봅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계신 곳을 바라봤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신적이 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41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나사로를 부르셨고 나사로가 살아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부활의 사건 앞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그 때를 앞두고 자비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가장 영화로운 것이며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자비가 필요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영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이고,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다할 때 다시 하늘로 돌아갈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때입니다.
 
'때'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영광의 때를 말합니다. 아버지의 임무를 완수하실 때 그 때가 예수님의 영광의 때입니다. 예수께서 영광이 되신 이유는 아버지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순종할 때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4-5절에 나와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5절에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내가 이 땅에 있는 이유를 알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아버지와 함께 나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 영화롭게 하는 일은 영생을 주는 일입니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의 일이자 그것을 주는 것이 예수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 '알다'는 헬라어로 γινώσκω입니다. 알다, 지식을 가지다, 관찰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γινώσκω 는 지식을 말하는데 호세아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호세아 6:3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4:6에서는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피상적인 앎이 아닌 서로 교제하는 관계로서의 앎을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가 나에게 어떻게 하시는 지를 알고, 이런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앎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나 저 연예인 알아'라고 말하는 것과 '나는 우리 아버지를 알아'라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것은 아버지의 인생과 나를 대하시는 방식, 성품, 원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느껴지는 감정도 있습니다. 긍휼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관계적 앎은 특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이러한 전체적인 교감과 감정, 삶, 경험 등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 뜻대로 살 수 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는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장은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고요.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잡히시기 전에 기도를 하시는데 먼저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아버지를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다하는 자에게 영화로운 관이 씌워집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해달라고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으로 그분의 뜻을 다 이루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나도 영화롭게 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 되게 하옵소서.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러러 바라봅니다. 자비를 베푸시고 나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화로움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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