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드로는 2장에서 예레미야 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때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거짓 예언자들이 거짓 예언을 하고 나라의 위기 속에서도 지도자들은 자신의 배만 불리고 아무런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모습은 어떤 부분들이었을까요?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들에게 했던 말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2. “예언자들아 들어라. 내 심장이 내 속에서 터지고, 진실로 이 땅에는 음행하는 자들이 가득 차 있다. 예언자도 썩었고, 제사장도 썩었다. 심지어 나는 그들이 나의 성전 안에서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3. 예레미야의 비탄함이 느껴집니다. 예레미야의 비탄함은 다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악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하는 그 곳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말하지 않고, 평강하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강건하고 평강할 것이다. 제사장들은 오랜 익숙함과 안주된 교리를 통해 나태한 종교적 습관들만 행할 뿐이었습니다. 고인 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4.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엄중한 말씀이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5. 그 예레미야시대 때를 인용하며 오늘 초대교인들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짓 선생들이 있다. 선지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듯이 보입니다. 베드로도 예레미야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인간의 죄된 모습, 거짓 선생들의 모습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6. 어제 우리가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원전이나 기원 후나 크게 다르지 않게 적용되어감을 느낍니다. 인간의 부족한 모습을 느끼는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맞게 다르게 적용될 뿐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부도덕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속입니다.
7. 그러나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 사건과 롯의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지 않고 죄악에 물들어 살며 다른 이들까지도 죄의 길로 데리고 가는 자들에게 더 크게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더욱 그렇구요. 교회의 리더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옳게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8. 우리가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이끌려면 우리가 옳게 따르는 자가 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되셔서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내가 너희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잘 하면 됩니다.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그대로 실천하고, 말을 잘 듣는 학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학생이 되고 좋은 선생도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선생을 만나야 좋은 학생이 될 수 있고, 그 경험이 있어야 그 모범적인 학생이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9. 미국에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몇 년 전 하나님 품으로 가셨는데요. 메시지 성경과 여러 신앙서적을 쓰신 분입니다. 그분의 아들도 목사님이어서 그 아들이 목회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1999년부터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서신서를 보냈듯이 디모데서와 같은 서신서를 젊은 목사인 아들에게 지속적으로 여러 목회의 경험과 교훈과 사랑을 보낸 글입니다.
10. 그 중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나눠드리면요. “우리의 기본적 정체성은 리더가 아니라 팔로워이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끌라는 말씀대신 따르라는 초대장을 주십니다. 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중에 랍비의 안내를 따르는데 사람들이 계속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뭐합니까?, 어디로 가나요? 점심식사는 언제 합니까? 이 등산로는 왜 오르는 거지요? 그 랍비는 대답합니다. “잘 들으세요, 나는 어디로 가는지 잘 압니다. 나를 믿으세요. 우리가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미리 말하면,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잘못된 생각들이 형성되기 시작해요. 믿음으로 걷는 일에는 자신이 모르는 것, 예상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듣는 데 열려 있는 자세가 포함됩니다.”
11. 좀 알려주면 되지 조금 야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수님도 언제나 제자들에게 바로바로 이야기해주시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침묵하실 때가 무척 많았습니다. ‘갈릴리로 가자’, 나를 따르라, 질문에 답하시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12.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준비를 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 인생에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측할 수도 없고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답을 찾기가 불가능합니다.
13. 그러나 우리의 길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두렵고 염려가 되고 알 수 없는 미래가 펼쳐져 있지만 답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곁을 떠나 왜곡된 곳으로 갈수도 있습니다. 화려해 보이는 것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적인 현상들도 우리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오늘 9절 말씀처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아멘 우리의 삶에 어렵고 힘든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오롯이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15.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도 삶의 여러 어려움을 가지고 오신 줄로 압니다. 우리는 서로 알아갈수록 서로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멀리서 보면 다들 좋아보여도 가까이 가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픔과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고난을 들으라고, 그 고난을 위해 기도하라고 부르신 줄로 압니다. 그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힘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충분히 이겨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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