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보기보다 자꾸 다른 곳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집중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많이 있죠. 내가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하는 능력과 실력들이 있는데 그것보다 다른 사람의 능력이 더 눈에 띕니다. 자꾸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게 됩니다.
제가 여기 오고나서 성도님들께서 조금씩 여쭤보십니다. ‘이 동네가 참 작죠, 뭐가 많이 없어요.’라고 물으시면서 불편하신 것은 없는지 안부를 물으십니다. 아직 제가 이곳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많이 좋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이소도 있는 줄 몰랐어요. 다이소가 있으면 다 있는거죠. 그리고 저는 많이 있는 것을 찾아서 왔다기보다 없는 것을 따라서 왔기 때문에 ‘없는 것’이 제 목적지였기 때문에 ‘없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누릴 수 있는 것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 살던지 우리는 안 바쁜 사람이 없을 겁니다. 모두가 다 바쁘게 살아갑니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이죠. 백수도 바쁘고 어린 아이들은 더 바쁘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도 지금 너희가 이미 받은 것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베드로는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변화산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타보르산이라고 하죠. 그 높은 산인 타보르산에 올라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본 때를 회상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기억입니까? 제자들과 예수님의 빛이나는 모습을 본 기억.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기억. 그리고 그 때 하늘로부터 들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했던 하나님의 음성. 잊을 수 없는 강력하고 충만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았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시간.
그런데 베드로가 늘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죠. 우리는 베드로의 변덕스러움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떠난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새롭게 예수님의 진리를 깨닫고 이제 그리스도를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변질된 진리들이 많았습니다. 거짓교사들도 많아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가르쳤던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 곧 임하실테니 일상생활이 필요 없다고까지 주장하거나 또 다른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지 않으실 것이라 왜곡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느끼고 자신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그대로 중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새로운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새롭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고 우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 보시는 것이지 우리가 말씀을 새롭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새롭게 보는 눈은 필요합니다.
지난 주에 제가 석사과정에 있는 전도사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영성에 대한 새로운 책이나 요즘 많이 알려진 교수님이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는 말씀이 새로운 것들보다는 고전을 더 지속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옛 것을 그대로 반복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오랜시간동안 축적되어오고 견고하여진 그 고전의 연구들이 그저 옛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하지 않고 더욱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은 그대로 지킨 채, 그 진리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함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다른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 교사들의 말에 속지 않고, 새롭고 뭔가 있어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중심이 바로 서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19절에 보면요.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구약시대부터 이루어져 온 예언의 말씀은 우리의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푸는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언제나 교회에 있습니다. 공동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권위를 주셨고,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지라도 그것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말씀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사사로운 이익과 미혹될 일에 쓰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쓰입니다.
물론 우리가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을 갖고 깊은 기도로 들어가고 마음의 영이 충만하여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공적으로 퍼져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교회와 또 교회는 세상으로 그 진리를 세워 나가는 일, 진리를 이루어가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원해 내는 일에 쓰임 받았듯이, 신약시대 모든 제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으로 변화되어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하고 외국인들에게 말씀을 사용했듯이 오늘 하나님의 예언을 따르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오래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고 나눔으로 우리의 마음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시간을 갖고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그 샛별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샛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작은 삶에서 예언의 샛별을 잊지않고 따라가는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잠깐 찾아오는 새로움에 이끌리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이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깊이 묵상하고 깊이 곱씹으며 되새기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 자신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깊이, 묵묵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길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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