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4-29
도마는 ‘의심’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마를 볼 때 단순히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만 보기에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도마는 충성스러운 제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강하게 의심하고 믿지 않았던 강한 표현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도마는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1 장에서 나사로가 심하게 앓아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나사로를 가리켜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예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셨던 남매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제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람들에게 돌로 맞을 뻔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며 돌로 치려해서 예수님은 지금 요단강 쪽으로 피신을 오셨습니다. 그런데 병든 나사로가 있는 곳은 예루살렘 가까운 곳 베다니였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면 아직 분노에 차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돌로 칠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나사로를 위해 그곳으로 가자고 하시니 제자들이 말립니다.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 , 그런데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칩니다.
여기서 도마의 용기와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자고 하시니 도마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나아갑니다. ‘우리도 나사로처럼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 도마가 등장하는 곳은 요한복음 14 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마련하고 다시 오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도마가 질문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의 질문으로부터 예수님의 위대한 답이 나옵니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낳습니다. 어쩌면 그냥 질문이 답을 낳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바치며 죽으러 가자고 외쳤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 저도 제가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확신에 찬 모습은 사라지고 갈 길을 알지 못하는 흔들리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렇습니다. 어떤 때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살아가다가도 어떤 때는 흔들리는 마음, 연약한 마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마가 질문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흔들리고 알지 못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고백하며 질문했습니다. 이 솔직한 질문에 예수께서 위대한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관심이자, 알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질문하지 않습니다
-나는 솔로-
-여름성경학교 은호가 밤에 통화하는 전도사님 여친있다고 한거-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있고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알아갑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며 배우는 데 힘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성경을 읽고 공동체의 지체들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입니다. 들어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철학자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인가? 진짜 있는 건가? 악마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이성의 가장 기본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근대 시대의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 철학자 데카르트가 결국 생각해낸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해도 결국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철학의 시작을 ‘생각’, 또는 ‘의심’, ‘질문’이라고 합니다. ‘생각하고 있는 나’, ‘의심하고 있는 나’, ‘질문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게 확실한 이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했던 말입니다. 고대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고 기독교를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도 하나님을 증명하는 일에 고심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심하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방황할 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의 것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이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존재임은 확실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요.
우리가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힘든 현실 때문일 수도 있고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일 것입니다.
그림을 보겠습니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입니다.
카라바조는 반항적이면서 천재 예술가입니다. 얽매이는 삶을 싫어했고, 성격이 불 같아서 여러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폭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살인까지도 행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문제가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성직자들이 구해줄 정도로 천재적 재능을 소유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림도 강렬한 그림이 많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도 있고요, 세례요한의 참수에서도 잘려진 머리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림을 보니 배경은 아무것도 없이 캄캄합니다. 사람들만 밝은 톤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과 옷은 흰색입니다. 예수님이 밝아서 거기서부터 빛이 나온다고 했을 때 제자들의 이마가 빛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사람의 머리가 마름모를 그리며 모여있습니다. 인간의 머리, 곧 이성이 모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머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인간의 머리가 모여서 얼마나 열심히 고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마에 주름도 졌습니다. 주름진 이마는 세월의 경험과 심각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때 당시 사람들과 다르게 조금 반항적이고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린 사람인데요. 그래서 강렬하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도마의 손가락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두 손으로 한 손은 받치고 만지는 것도 아니고 왼 손은 옆구리에 올린 채, 의심하는 자세 그대로 오른 손만 옆구리에 넣습니다.
그때 당시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도 시선이 모두 창자국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진짜인가?’하는 눈빛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도마가 예수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히 손을 넣어봤겠습니까? 그런데 선이 없는 예술가 카라바조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도마가 손을 넣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런 의심하고 궁금한 게 많은 도마를 인상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손입니다. 오른 손 왼 손 둘 다입니다. 예수님의 오른 손은 옷을 걷어내 창자국을 보이시는데 사용합니다. 오른 손으로 자신의 옷을 걷어 의심하는 도마와 제자들에게 기꺼이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왼 손은 어디에 있나요? 도마의 오른 손목을 잡고 있습니다. 도마보다 더 앞서나가시는 예수님입니다. 조금은 쭈뼛쭈뼛하고 있는 도마의 오른 손을 자신의 상처로 끌어당기십니다. 그 손등에는 못자국도 조그맣게 보입니다.
결국 못자국의 상처를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의 오른 손을 잡으시고 직접 자신의 상처를 만져서 확인해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도마에게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처를 만져봐라 그래서 믿는 자가 되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의심을 허락하십니다. 의심을 통해 확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 회의, 질문을 통해 견고해집니다. 오히려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신앙이 위험합니다.
모태신앙의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성인이 되어서 세상에 나가면 믿음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믿음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도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의심해보지도 않고 부모님만 따라 다닌 믿음은 강해질 수 없습니다. 흔들려야 강해집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너무 기후가 좋은 곳에서 자란 나무는 뿌리가 깊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람이 강하게 불면 쓰러집니다. 가끔씩 우리의 신앙의 뿌리도 진리의 물을 찾아 헤매면서 강해져야 할 것입니다. 흔들리고 회의하면서 더 넓게, 더 깊게 견고하게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확신에 찬 사람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없다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합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경험이나, 이데올로기나, 생각들을 존중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고집만 부립니다. 그러한 질문없는 확신에서 갈등과 교만이 나옵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는 것만큼 오만한 태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세미나도 다니고 목사님도 찾아가고 열심히 답을 찾아가면서 믿음이 견고해졌다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질문을 할 때 우리는 답을 알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라고 하십니다. 그 질문을 통해 우
-과학 신앙 의심했던 동주 청년 이야기-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세미나도 다니고 목사님도 찾아가고 열심히 답을 찾아가면서 믿음이 견고해졌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중에 누가 가장 멀리 복음을 전했는지 아시나요?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고 야고보도 아니고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그쳤고, 로마까지 갔습니다.
교회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가장 먼 곳, 인도 케랄라까지 복음을 들고 갔고, 거기서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섬기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의 신앙도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질문으로 얻은 답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알고 더욱 주님의 뜻을 가깝게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
주님을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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