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2
예수님과 제자들이 혼례에 청함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미 계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어머니와 가까운 친척 관계의 혼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가야했던 가까운 가족의 혼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족들이 함께 생활했던 나사렛에서 가까운 가나에서 혼례가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모두가 모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식에는 초대를 받아야 갈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일주일간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에게는 돈이 많이 들었겠지만 즐거운 잔치 시간입니다. 평소 먹을 수 없었던 음식도 먹을 수 있고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과 친척들, 친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 결혼 풍습을 보면요. 먼저 약혼을 합니다. 당사자들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약혼을 맺습니다. 우리 자녀하고 그 댁 자녀하고 결혼을 합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 번 더 확인을 합니다. 약속을 했으니까 그 약혼이 유효한지, 다시 찾아가서 확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를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것을 계속 지킬 것인지 묻습니다. 그걸 정혼이라고 합니다. 약혼을 확인하는 것이 정혼입니다.
이렇게 정혼이 확정되면 같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로 간주가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인 마리아와 요셉도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함께 살지는 않지만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이렇게 결혼을 하기로 계약이 성립되면 남자가 포도주를 따라서 여인에게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 포도주를 당신에게 따라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도 이 잔을 받아 마심으로 나의 아내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포도주 한 잔을 주면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성찬식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나서 년 동안 결혼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신랑은 신부와 함께 살 처소를 준비하고요. 신부는 결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1년동안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신부를 모시고 옵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날 특별한 것을 하는데 과거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의미에서 금식합니다.
우리는 폭식하지만 유대 전통에서는 금식을 하면서 거룩한 날로 보냅니다. 그래서 그 날을 개인의 대속죄일이라고 말합니다. 대속죄일은 1년에 한번 하나님께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날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7대 절기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절기로 여겨졌습니다. 욤 키푸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욤키푸르라고합니다.
그리고 결혼식 절차를 다 마치면 신랑 신부는 하나되는 의식을 치루기 위해 준비된 신방에 들어갑니다. 그 신방에서 의식을 치룬 다음에 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가 행복한 결혼을 시작했습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부터 결혼 잔치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혼인 잔치가 이레동안 열립니다. 이레동안 열려야 하니까 음식도 거하게 준비해야 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고기도 먹을 수 있고, 포도주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 지방인 예수님의 고향은 가난한 동네이기 때문에 평소에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없었고, 고기도 못 먹었을 것이고요. 포도주도 그때 당시 일반적으로 먹는 음료였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그마저도 귀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이 포도 열매가 잘 열리고 포도주를 주로 먹었지만 그것은 상위층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포도주와 고기를 좋아하고 탐하며 즐길 수 있는 자들은 특권층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만큼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배불리 먹고 고기도 먹고 포도주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릅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그 혼인 잔치를 주관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이 어느정도 있는지 주방 상황이 어떤지, 손님들이 어느정도 왔고, 앞으로 얼마나 더 와야하는지, 포도주가 얼마나 더 필요한지 잔치를 주도하는 가족의 핵심 멤버였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주일 점심마다 주방에 계신 권사님 집사님들이 항상 사람 파악을 하시죠. 식사하시러 얼마나 오셨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하시면서 바쁘게 국수를 나눠주십니다. 제게는 살찌라고 특별한 사랑을 담아서 많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고생이 많으시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국수를 먹으러 왔는데 국수가 없다고 하시면 이제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잔치 집에 중요한 포도주가 부족하게 된다면 잔치의 흥이 깨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와 가족들에게 있어서 좋지 못한 징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결혼 시작부터 문제가 생기고 부족함이 생기면 풍성함과 충만함을 기원하는 시간에 괜히 마음이 상하고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걱정하는 마리아는 다급한 마음에 예수께로 와서 부탁을 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예수의 어머니는 아들 예수께 걱정 반 기대 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큰일 났다는 마음과 아들 예수께서 무언가라도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두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자여’라는 말은 거리를 두는 표현입니다. γυνή(귀나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귀나이’, ‘여자여’라고 부르셨고요.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전서서 3:5 에 나타나는 ‘거룩한 부녀들’도 ‘귀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여자여’라고 호칭을 부르는 이유는 마리아의 말을 예수께서 심오한 의미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포도주가 없다’라고 하신 말을 예수께서는 특별하고 심오한 의미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런 말을 하실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어머니의 말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내야하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사역을 시작해야함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응답을 한 것입니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보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줘야 할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자신은 이제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공생애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 마리아와 거리가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서운했겠지만 아들은 독립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향해서 이 ‘여자여’라는 호칭은 요한복음2 장과 요한복음 19:26 에서도 등장합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처음과 요한복음 끝에 두 기둥처럼 ‘여자여’라는 말과 의미가 세워져 있습니다. 19장 26절에서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나옵니다.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의 남은 여생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면서 나왔던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본다면 조금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니까 안쓰러운 마음과 애정이 있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더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든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늘 이 죽음의 때를 목적지로 두고 살아가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유이자 예수께서 마셔야 할 잔이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큰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예수님에게는 심오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라고 했을 때 혼자 과하게 반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자신이 흘린 새 언약의 피를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9 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입에 먹이십니다. 그리고나서 숨을 다 하시고 한 군병이 옆구리에 창을 찌르자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포도주와 피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피’가 중요한데요.
누가복음 22:20 에 보면 피를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피는 곧 포도주이고 그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흘릴 피입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없다’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저들을 위해 흘려야 할 피가 없다’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늘 생각하셔야 했기에 예수님의 머릿 속에서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말은 ‘저들을 위해 흘릴 피가 없다.’, ‘저들을 위해 새언약의 피를 흘릴 사람이 없다’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저들을 위해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하고, 성령의 새 포도주를 공급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혼자 진지하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반응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고서야 갑자기 저렇게 혼자 신학적으로 심오한 과민 반응을 일으키실리가 없습니다. 마리아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라는 말을 예수께서는 ‘저 사람들에게 새생명의 피가 없다’라고 받아들이셨고,
예수님은 거리를 두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변하셔서 대답하시는데 ‘내 때’, 즉 ‘내가 옆구리에서 피를 쏟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라고 반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과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개의치 않으며 하인들에게 예수께서 시키는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도 마음을 잡으시고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양은 어느정도나면요. 돌 항아리 여섯이면 1.8리터 물병 400개 정도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720리터의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웠습니다.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유의 깊게 살펴볼 장면은 하인들이 순종하면서 물을 채워 넣는 장면입니다. ‘하인’은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스)입니다. 청지기라는 의미가 있고요, 집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집사’ 라는 말은 바울이 주로 사용했습니다. 일꾼과 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냥 하셔도 되는데 꼭 사람들과 같이 포도주 만드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항아리가 있으면 처음부터 포도주가 채워지게끔 기적을 행하시면 되는데 청지기들을 시켜서 물 720리터를 채우게 하십니다. 고생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청지기들과 함께 동역하기를 바라신다는 의미입니다.
청지기들은 우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디아코노스입니다. 주님의 청지기이고 주님의 일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저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물을 채우는 일을 계속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물을 채우는 일은 무엇인가요? 오랜 인내의 일들입니다. 예수께서 청지기들에게 요구하셨던 일은 포도주를 사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물은 정결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듯이 물은 씻음과 정결을 의미합니다. 6절에도 정결 예식에 쓰는 돌 항아리 여섯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항아리에 계속해서 물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합니다. 힘들더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벗어나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수고하며 우리의 항아리를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며 내 마음을 정결하게 하도록 늘 기도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 탓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나 자신이 회개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의 항아리에 물을 계속 채우면 그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우리의 물을 계속해서 채워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새 언약의 피를 맺은 거룩한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신랑인가요? 신부인가요? 우리가 결혼식을 하면 신랑이 먼저 입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회자가 말합니다. ‘오늘 결혼식의 진정한 주인공인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방금 입장한 신랑은 주인공이 아니라 들러리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신랑 신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없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신랑 신부가 누구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겠죠. 그러면 주인공은 누구냐면 예수님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1절에서도 이 사건을 첫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이라고 사용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가리키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가리키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앞으로 어떤 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실지 보여주는 중요한 표적 사건입니다.
우리도 요한복음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삶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 삶의 변화로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신랑되신 예수께서 나에게 포도주를 따라주시면서 ‘내 생명을 당신에게 바칩니다’라고 하는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아 성결하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주어진 물을 채우면서, 그 작은 경건의 일을 소중하게, 수고롭게 채울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거룩한 새 포도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하늘뜻펴기 > 수요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문하는 신앙 (4) | 2024.09.13 |
---|---|
발을 씻기시는 선생 (9) | 2024.08.28 |
요단 강을 건너야 한다. (1) | 2024.06.13 |
축복하라고 하시니 축복합니다. (0) | 2024.05.23 |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 (1) | 2024.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