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E.step 2022. 11. 1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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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대한 헛헛함이 파우스트를 괴롭게 한다. 아직도 알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차 있다.

 

"내 가슴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살면서

서로에게 멀어지려고 하네.

하나는 감각으로 현세에 매달려

방탕한 사랑의 환락에 취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이 티끌 같은 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숭고한 선인들의 세계로 나아가려 하네."(v.1112)

 

방탕과 숭고의 두 영혼이 산다. 그동안 숭고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인생이었을 것이다. 땅에서 살지만 천상의 존재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았겠는가. 숭고한 선인들이 천상의 노래를 하고 빛과 같은 진리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의자에 같이 앉고 싶을 것이다. 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배를 타고 물 위를 떠다니듯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이 세상의 원리를 자각했을 때 또 다른 욕망이 솟아난다. 그것은 방탕한 환락이다. 숭고한 가치에서 허무함을 느꼈을 때 인간은 저급한 지하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또 다른 욕구가 치솟는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 악마적 삶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것이다. 

 

이제 파우스트는 지식에 대한 환멸에서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행위를 결심한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v.1237)

 

'logos'에서 행위로의 전환이다. 지식을 위한 삶이 아닌 인생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발돋움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악마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와 다른 존재라기보다 내면에서 갈라지는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과 더불어 모든 것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다. 메피스토는 말한다.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만들어 내는 힘의 일부이지요."(v.1336)

 

어둠에서 빛이 낳아졌듯이, 악과 선은 두 개의 개체가 아닌 어우러져 있는 인간 내면의 모양이다. 완벽히 선한 인간도, 완벽히 악한 인간도 없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가 같이 공존하고 악을 행하는 듯 하지만 선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선이다. 선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것이 곧 선이다. 선과 악을 누가 구분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악도 자연에게는 선일 수 있다. 인간에게 선도 신에게는 악일 수 있다.

 

메피스토와 파우스트는 계약을 맺는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자네는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네.

그러면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네.

죽음의 종이 울려 퍼지고,

자네는 임무를 다한 걸세.

시계가 멈추고 바늘이 떨어져 나가고,

내 시간은 그것으로 끝일세." (v.1699)

 

파우스트가 세상에서 만족하는 시간을 가지면 악마의 승리다. 욕망 가득한 파우스트, 숭고한 존재가 되려고 했던 파우스트가 모든 욕망을 다 채우는 순간이 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신의 영혼을 메피스토에게 항복한다는 것이다. 순간에 대한 만족이 인간에게 있을 수 있을까.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이 만족하는 순간, '이대로 죽어도 좋다'하는 순간이 있을까. 돈으로 가득했을 때?,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성적 쾌락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닐 때?, 순교자들은 어떨까? 죽음 앞에서 만족했을까? 독립운동가들은 만족했을까? 숭고한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만족할까? 예수는 만족했을까? 그리고 이제 더 확고하게 말한다.

 

"내 말 명심하게, 기쁨이 문제가 아닐세

나는 도취경, 극히 고통스러운 쾌락,

사랑에 눈먼 증오, 통쾌한 분노에 빠져 보고 싶네.

내 마음은 지식에의 열망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떤 고통도 피하지 않을 걸세,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을

가슴 깊이 맛보려네.

지극히 높은 것과 지극히 깊은 것을 내 정신으로 붙잡고,

인류의 행복과 슬픔을 내 가슴에 축적하고,

내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 넓히려네.

그러다 결국에는 인류와 더불어 몰락하려네" (v.1756)

 

'Freude'기쁨이 아닌, 'Taumel'도취경을 원한다. 이 세계의 삶 자체에 몰입을 원한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통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생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도 악도 가리지 않고 다 끌어안고 몰락하겠다는 '욕망의 지속성이 문제'이다. 세계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초월적 존재가 되어보려던 파우스트의 노력은 이제 삶 전체를 누려보겠다는 역사속의 인간으로 전환된다. 그것도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그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영혼은 천사들에 의해 구원 받는다. 구원의 이유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끊임엇이 노력하는 것이 구원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파우스트는 가만히 누워있는 성격이 못 된다. 아마 그것을 가장 하심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 생겨났던 피해자들이 있다. 그레트헨, 발렌틴, 필레몬과 바우치스, 모두 비극과 죽음으로 끝이 났던 인물이다. 자신의 목표로 거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 목표 때문에 사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우스트에게 비난을 보낼 수는 없다. 파우스트는 처음 계약할 당시에 모든 것들을 경험한다고 했으며 특정한 목표를 지칭하느 ㄴ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으로 돌아갔다. 천사들의 구원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도덕을 벗어난 자연의 원리일 것이다. 파우스트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구름 위에서 자신과 같은 존재를 꿈꾸는 자는 어리석은 바보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이곳을 둘러봐야 하오

이 세상은 유능한 자에게 침묵을 지키지 않소.

무엇 때문에 영원을 찾아 헤맨단 말이오!"(v.11444)

 

파우스트는 '노력하는 인간'의 대명사다.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그는 노력하며 고뇌하는 인간이다. 그를 이용한 악마는 성취욕망을 상징한다. 성취하고자 하는 근대적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또는 성취 정도에 따라 인간들을 억압하는 비인간적 사회, 부정적 의미와 동시에 자연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고뇌하고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노력해도 되지 않는 생애, 이치를 알 수 없는 자연세계 앞에 인간은 절대적 기준에 부합했을 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에게 찾아오는 악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지 말할 수 없다. 마치 자연재해의 원인이 누구에게도 있지 않듯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은 일어날 것이다.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돌아가듯이. 자연은 인간을 받아낼 것이다.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 괴테, 파우스트, 열린책들, 

- 오순희, "아, 내 안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다!",

  그레트헨, 발푸르기스의 밤, 헬레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파우스트의 에로티시즘

- 오순희, 악마와 성모, 테오필루스 전설과 파우스트 드라마에 나타나는 '악마와의 계약', 독일문학 제12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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