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7-27
찬송가 341장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데리고 갑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는데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가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는 수평 십자가만 들고 가십니다.
크로스된 나무 두 개를 그대로 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직 나무는 골고다에 준비되어 있고, 팔을 못 박을 수평 나무만 지고 가십니다. 팔을 나무에 묶어서 팔을 십자가 자세처럼 펼친 상태로 나무에 묶어서 그대로 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가 세로 3m, 가로 2m정도 됩니다.
가로 십자가만 들어도 30kg정도는 됩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남성 무게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가로만 해도 한 30kg정도 될 것입니다. 만약 다 만들어진 크로스된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고 한다면 더 엄청난 무게였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무게, 걷기도 힘든 무게를 지고 600m를 걸어가십니다. 오르막길을 채찍으로 맞으시고 조롱도 당하시면서 모든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가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고통을 지고 가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29에 보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 여기서 '지고가다'의 원어는 'αἴρω'입니다. 없애다, 치워버리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즉, 없애 버리시는 어린 양이십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소리치며 예수님을 '없애 버리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했던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처음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곳에 등장한 예수님의 사명,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드러납니다.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드러났습니다. 유대인들을 통해서도 예수께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는 것, 세상 죄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짊어지심으로 죄 자체가 되셔서 없어지시고 제거 되십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시니까 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가복음 8:34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십자가입니다. 그 무게는 우리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 고통 그 악함을 지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작은 무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각자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죄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타인의 연약함, 고통, 죄를 내가 짊어질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잘 따르는 것입니다. 타인이 받아야 할 고통과 형벌을 내가 감당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가벼운 예로 자녀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부모가 학교 선생님에게 대신 죄송하다고 합니다. 자식의 죄를 부모가 짊어집니다. 자식은 부모의 십자가죠.
물론 그 자녀는 집에 가서 죄의 형벌을 부모로부터 더 과하게 받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구명해서 양자 삼은 사건은 안재선의 죄를 손양원 목사님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사랑으로 지신 십자가입니다.
17절에 예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합니다. 그냥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시고 감당할만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할 커다랗고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양자 삼으신 안재선은 손양원 목사님의 권유로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기대와 핍박을 받게 되면서 조용히 평범하게 지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나이로 48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돌아가시고나니 보호해 줄 사람도 없어서 세상에서 핍박을 받아서 평범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 안경선 선교사님이 그 뒤를 잇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할아버지 손양원 목사님과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에 뜬금없이 자신에게 신학교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장례식에 손양원 목사님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사랑의 원자탄' 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책을 보고 아버지가 가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나서 정체성의 혼란이 오고 폐에 문제가 생겼는데 치료도 거부하고 죽고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10시간 넘는 폐 절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네 아버지는 동인, 동신을 죽였지만, 너는 나를 죽였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깊은 상처에서 치유를 얻고 아버지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고 지금은 아프리카 브룬디에 있는 한센인들을 섬기는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안경선 선교사님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들었떤 음성, '네 아버지는 동인, 동신을 죽였지만 너는 나를 죽였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품을 수 있던 이유는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안경선 선교사님이 살인자 아버지의 죄를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님을 피흘리게 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다른 이의 죄를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멋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지기는 커녕, 고발하고 채찍질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기적입니다. 십자가 위에 붙이는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합니다.
자신들은 조금도 피해보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오해할까봐 걱정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그래서 남을 죄인이라 못박는 자가 아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빚진 자들이 죄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깨달아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제게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