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주일저녁예배

깨우러 가노라

E.step 2024. 5. 1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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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16
나사로는 베다니에 살았습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 남매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지역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약 3km지점에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입니다.

베다니 이름의 뜻은 ‘가난한 자의 집’ 혹은 ‘푸른 과일의 집’이란 뜻입니다. 푸른 과일은 익지 않은 과일을 뜻하겠죠? 아마 베다니라고 하는 지역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 사는 동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증거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가 있죠? 비싼 향유를 사서 예수님의 머리에 바른 이야기가 있던 곳도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거기서 가룟 유다가 향유를 깨뜨린 마리아를 향해 나무랐습니다.
‘이 비싼 걸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데 왜 허비하느냐’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 비싼 걸로 이 베다니 지역에 많은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데 왜 거기다가 허비하느냐’이런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 지역은 가난한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24:50 에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베다니 앞까지 나가서 손을 들고 축복하십니다. 베다니 근처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시고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베다니는 가난의 땅이자 부활의 영광이 있던 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저녁이 되면 베다니에 오셔서 머무시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베다니는 예수께서 좋아하시고 친근한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께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표현으로 예수께서 나사로를 가리켜서 3절에 나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를 향해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인정을 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하는 제자는 요한을 떠올립니다. 그만큼 나사로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가시기를 지체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걱정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예수께서는 이틀을 더 지체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주 갔던 곳이고, 그들을 아끼신다는 것을 알았고, 제자들도 그곳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를 고쳐야 하고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해줘야 한다고 예수께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유를 부리십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아픔에는 이유가 없죠. 한 사람의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은 폭력적인 질문입니다. 고통은 누구나 겪는 것이고, 불완전한 이 세계에서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다 고통을 겪습니다. 병에 걸리기도 하고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요,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것을 그 사람의 잘못으로 파헤치는 것은 잔인한 행위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자매가 신앙이 있었는데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져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낳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예쁜 아기가 생기니까 감사한 마음도 생기고,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신은 너무나 약한 엄마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는 애가 끓습니다. 그래서 내가 뭔가 잘못했나? 내 죄 때문에 그런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는 내 자녀의 아픔이나 약함, 나의 약함이나 고통이 하나님에게는 자랑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상황이 안 좋다면 더 하나님을 나타내기에 좋은 상황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병의 이유를 찾지 않으시고 그의 약함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화시키십니다. 그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병에 걸렸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로 뒤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나사로의 병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나사로와 같은 병이 있을 수 있고요, 고난의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무언가 하기에 좋지 못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질병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에 알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더 잘 보여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못났다면, 세상적 기준에서 좋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시는데 우리도 같이 동참시키실 것입니다.

<미라클 프롬 헤븐> 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작년에 아동부 아이들과 봤던 영화인데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 아빠와 세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고요. 아빠는 푸른 초원에서 목장을 합니다.

어느 날 둘째 딸 애나가 복통을 호소합니다. 토하고 배는 부풀어 올라요. 병원에 가 보았지만 모든 검사 결과 이상이 없습니다. 애나의 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장폐색이 100% 진행되어 몸이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엄마 크리스티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딸의 고통 앞에서 크리스티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부부에게 뭔가 죄가 있어서 아픈 것 아니냐며 상처가 되는 말을 합니다. 병원에서는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를 소개해서 보스턴으로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누코 박사를 어렵게 만나서 약물 치료를 하며 이겨내보자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애나는 통증이 심하고 죽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 합니다.

누코 박사는 잠시 치료를 중단하고 가족들과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집에서 놀다가 애나는 언니와 함께 집 앞 100년 높은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둘레가 넓은 나무 속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꺼낼 수 없는 상황이 119를 부르고 뉴스에도 나오게 됩니다. 엄마는 나무를 붙잡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시간 뒤 애나는 구출되고 병원에서 잠시 의식을 잃은 채 지냅니다. 그러다가 깨어났는데 그의 몸이 싹 낫게 됩니다. 다친 곳도 없고 배가 많이 부풀어 있던 것도 들어갔습니다. 소화기관이 충격에 의해 다시 움직이게 된 것처럼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애나가 나무 안에 추락해서 깨어났는데 자기 몸이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봤다고 해요. 예수님이 거기 계셨는데 자신을 향해 무언가 느끼게 하셨다고 합니다. 말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으로 그 말을 느꼈대요.

예수님이 애나를 치료해주신 겁니다. 애나와 가족들은 애나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교회 사람들로부터 상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아픔이고 겪고 싶지 않았던 딸의 불치병은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고, 그들은 다시 교회에 가서 간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딸의 병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딸의 아픔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고난이 간증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를 향해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기다리십니다. 예수께서는 뭔가 자신이 있으셨는지 여유롭게 시간을 기다리십니다. 예수께서 몸을 피신하셨던 요단강 동편에서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까지는 약150km거리입니다. 걸어가면 4일 정도 걸려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나사로가 이제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2일을 더 머무시고 출발하셨다는 것은 죽은 후에 4일째 도착하셨다는 것은 죽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3일장을 하죠?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해지실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죽은 후 3일이 지나야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더 확실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확실히 죽을수록 하나님이 일하시기 좋은 상황인가 봅니다. 상황이 안 좋을수록, 고난이 심할수록 그렇게 시간을 기다리셨다가 베다니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여서 방금까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며 잡아서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그것을 피해서 요단 동편으로 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말리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9절부터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실족한다.”

낮에 다니면 넘어지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걸려 넘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하는 힘든 상황을 겪을 때 하룻밤 자고나면 괜찮아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는 너무 힘들었는데, 날이 밝으니까 이제 괜찮네, 별거 아니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큰 일을 겪어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집니다. 그 문제 때문에 죽을 거 같았는데 막상 하루 자고 나니까 이 문제 때문에 내가 죽을 일은 아니지 이렇게 마음이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면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겠지만 그거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일이 내 앞을 막지는 못한다. ‘내가 갈 길은 가야지,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지’ 하며 길을 나서시는 겁니다.

우리도 어두운 일이 있을 때 우리가 밤에 갇혀 있을 때 그 밤과 같은 상황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해는 다시 뜨고 우리 안에 빛은 다시 드러납니다. 그런데 너무 밤에 머물러 있고, 자꾸 밤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넘어지게 되고 실족하게 됩니다. 다시 빛으로 나아가야 하고 빛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출발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하시며 굉장한 애정을 드러내세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깨우십니다. 밤에서 낮으로 깨우십니다. 이것은 어두움에 매몰되어 있을 때 빛으로 나아오라는 깨우심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환난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앞을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모습을 깨뜨려서 정신차리고 다시 빛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꾸는 일에 묵묵히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죽을지라도, 우리 자아를 죽이는 일일지라도, 도마처럼 ‘죽으러 가자’라는 고백으로 걸어가는 삶입니다.

우리를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이 깨우심은 밤에 갇혀 있지 말고 빛의 일을 성실히 하라는 깨우침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한 주간도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과 같은 어둠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묵묵히 해 나가시는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잠에서 깨워주옵소서. 밤에서 낮으로 부정에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낙심하는 일로 인해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 나갈 힘을 주옵소서. 우리를 깨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2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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