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28-38
빌라도는 ‘창을 가진 자’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도 나와있듯이 예수님에게 반역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게 했던 총독이었습니다. 유대 땅을 관할한 5번째 총독입니다. 사마리아, 이두매, 유다 땅 이렇게 이스라엘을 관리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파견되어 온 총독입니다.
당시 유대 총독은 유대인들의 사형 집행권과 지방법원의 결정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대제사장의 임명권을 가졌습니다. 군사, 사법, 종교를 두루 관장하는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였기 때문에 큰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도 ‘산헤드린 공회’라는 최고 통치기구가 있었지만 로마 아래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국회가 있었지만 로마가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법적인 최종 결정권은 로마 총독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임명권도 로마 총독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자리를 돈을 주고 들어가기도 했었습니다. 레위의 자손들이 제사장을 했지만 대제사장 자리는 로마 총독의 마음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부패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갔던 대제사장도 안나스였는데요. 안나스는 은퇴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현직 대제사장은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또한 안나스의 아들들도 대제사장직을 맡았었습니다. 그만큼 안나스는 자신의 집안 사람들을 대제사장 자리에 세워둠으로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영향력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로마 군영은 가이사랴에 본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이 만든 항구도시입니다. 로마와 왕래하고 무역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항구도시입니다. 로마와 이스라엘을 왕래하기 위해 가장 빠른 지역이자 교통편이 가이사랴였습니다. 그 교통이 편리한 도시에서 총독 빌라도가 주로 지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이나 명절과 같은 특별한 시기에만 주둔했습니다.
명절과 같은 특별한 시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시위를 일으킬 수도 있고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는 사회 질서를 위해 총독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주둔하여 질서를 잡았습니다.
총독의 관저는 πραιτώριον 프라이도리온 이라는 헬라어인데요. 장군의 본부를 가리킵니다. 장군의 거주지. 원래 이 단어는 로마의 야전 사령관이 있는 사령부나 막사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지방 관리의 관사나 저택, 별장, 총독의 관저로 다양하게 쓰이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빌라도의 관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프라이도리온은 성전 뜰 북쪽에 안토니아 탑이 있는데, 그 안토니아 탑이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총독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유월절 전날이어서 빌라도가 예루살렘 관저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저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웃긴 것은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제 유월절이 시작되기 때문에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방인과 접촉을 피합니다. 법을 따라서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군병을 통해 예수님을 관저 안으로 데려가고 유대인 자신들은 밖에 서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으로 정결함은 철저히 지키면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인들이 가지는 실수입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뿐이고, 타인을 위한 희생은 없습니다. 자기만 위한 거룩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자신이 희생하심으로,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의 거룩은 타인을 더럽다고 규정함으로 상대적으로 얻어지는 이기적 자칭 거룩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상황이 특별한 것은 고나저를 두고 빌라도와 예수님은 안에 있고 유대지도자들은 관저 밖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장면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예수님과 빌라도가 있는 관저 안과, 유대 지도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고나저 밖입니다. 두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다른 공기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께서 대화하시는 조용하고 의미있는 상황과
유대인들의 살기가 느껴지는 관저 밖 상황입니다. 빌라도는 왔다갔다 하면서 장면을 오고가며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빌라도가 관저 밖으로 나와서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추상적이고 우활한 고소문입니다. ‘악한 일’이라고 하는 단어의 원어는 κακός입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잘못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범죄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맘에 안 드는 것이고 싫을 뿐입니다.
총독이 재판하기 위해서도 로마에 위협이 되어야 합니다. 총독에게 있어서 악한 일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반역하는 죄목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죄를 범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총독도 ‘데려가라’고 합니다.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지도자들은 위험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20:19에서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이방인의 손에 넘거져서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빌라도는 관저로 들어갑니다. 장면이 바뀝니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예수께서 묻습니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아니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준 것이오?“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그저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그런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말이 누구의 생각인지를 물으십니다. 빌라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무 영문을 모르는 총독은 당연히 나는 유대인이 아니니 모른다고 합니다. ‘당신들의 말이다’라고 합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겼으니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스스로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왕이오.”
당시 왕의 개념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5가지만 얘기하면요. 당시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에 의하면 이상적인 왕은 ①입법자왕 ②철학자 왕 ③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왕 ④목자 ⑤신의 뜻을 따르고 신과 친밀한 왕 이렇게 다섯 가지의 자격이 있었습니다.
입법자라고 하는 것은 법을 만드는 자입니다. 법을 만들고 법에 따라 통치하는 왕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철학자라는 것은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고스’라고 하는 이성을 따라 다스려야 합니다.
셋째로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를 이루어가야 좋은 왕입니다.
넷째로 목자로서의 왕은 백성을 공평하게 배분하고 짐승의 위협에도 양을 보호하는 목자가 좋은 왕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로 전적으로 신의 뜻을 따르고 신과 친밀한 왕이라는 것은 신에게 영감을 받은 ‘신적인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나기보다 신이 배분한 몫에 따라 행하고 신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자가 진정한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자입니다.
이 왕의 자격을 가지고 고대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모세가 가장 적합한 왕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역사와 철학을 알고 있는 요한복음은 그 왕에 가장 적합한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첫째로 입법자로서의 예수님은 말씀으로 법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리고 새계명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는 새 법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질서를 창조하시고 새 계명까지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지혜로 사람들을 밝히 깨우치시는 빛이십니다. 사람들을 어둠에 다니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는 참 빛, 지혜자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창과 칼로 이기지 않으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목자되신 왕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내용처럼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되십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과 친밀한 왕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친밀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되십니다. 하나님 자신되셔서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시기에 모든 조건을 갖추셨습니다.
그렇다면 왕되신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 밖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 저 멀리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포함한 나라입니다. 주님의 통치가 있는 그 곳 어디든지 주님의 나라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다스리는 주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닌 통치의 개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는 그곳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슬픔이 없는 것이 주님의 나라가 아니라 슬픔이 있지만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곳이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연약한 자가 없는 것이 주님의 나라가 아니라 연약하고 병든 자들이 있지만 주님이 함께 하셔서 병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곳, 그곳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시는 자신의 나라도 차이를 얘기하실 때 너희와 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중점을 두십니다. “당신들의 방식대로 하면 사람을 모아서 군사를 일으키고 너희와 싸워서 나를 잡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의 방식은 이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의 방식, 자본이 지배하는 구조, 의로움보다는 이긴 자가 옳은 것이 되는 세상의 방식, 약한 자는 무시 당하고 차별 받는 세상의 구조,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자를 죽이는 방식에서 주님의 나라는 약한 자들이 행복한 나라, 돈의 힘이 약한 나라, 의로움이 가장 가치있는 나라, 타자를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나라, 죄인을 살리기 위해 의인이 죽는 역설적인 주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나라를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이미 완성되었고 그 완성된 나라를 향해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신다면 그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속한 자라면 그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진리의 나라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약한 자가 행복한 공동체와 나라를 만들고, 힘이 아닌 평화로 공동체와 나라를 이루어 가고, 물질이 아닌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은 우리와 왕이십니다. 왕되신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에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셔서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 속한 자, 진리에 속한 자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2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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