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창세기 21:8-21
찬송가 365장
이삭이 젖을 떼는 아이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큰 자치를 베춥니다. 당시 젖을 떼는 시기는 3세 정도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아이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은 모유였기 때문에 아이가 뗄 때까지는 모유수유를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아기들이 병에 걸려 쉽게 사망했기 때문에 엄마가 잘 돌봐야 했고 유아기의 시기가 지날 때까지는 걱저오디는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의학이 발달되어서 아이가 잘 죽지 않습니다. 물론 원인불명의 급사하는 아이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예방접종도 시기마다 다 있고 병원을 안방처럼 다니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기 쉽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다보니 돌잔치도 잘 안하고 그렇습니다만 아브라함 시대에는 축제였습니다. 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삭이 젖을 떼고 마루기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고 무언가 가르칠 수 있는 몸과 머리가 건강한 아이가 되니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삭과 이스마엘이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과 이삭이 같이 노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놀리는 것입니다. '놀리다'의 מְצַחֵֽק׃차하크는 본래 '웃음'이라는 뜻인데요.
강하게 이야기할 때는 '비웃다, 조롱하다'의 의미가 됩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바뀝니다. '이삭'이라는 이름도 같은 단어인데요. 이삭도 '웃음'이라는 뜻이죠. 이삭을 비웃었다. '웃음을 비웃었다', '웃음을 조롱했다'라고 언어유희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라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 아들은 웃음인데 비웃으니 조롱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차하크'라는 단어는 '놀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창세기는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고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놀린 것인지 웃은 것인지, 어쩌면 사라가 이스마엘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놀리고 있다고 비뚤어진 시선으로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라를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두 번이나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남편으로부터 이집트 왕에게, 아비멜렉 왕에게 넘겨짐을 당했습니다.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겠죠. 아브라함이 자신을 왕에게 두 번이나 보냈으니 자신은 버림 받았다고 두 번이나 느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서럽고 팔려간 것도 서럽습니다. 차라리 종으로 사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아들 이삭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이삭만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삭 옆에 아들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는 첩의 아들 이스마엘이 있으니 좋아 보일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 아브라함에게 가서 "내쫓으라"라고 합니다. 10절에서 말합니다. 내 종과 종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물려 줄 기업은 없다. "내쫓아라" 사라의 단호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자기 아들을 지키기 위한 극성 엄마와 같은 모습이지만 사라의 삶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합니다. 하나는 이스마엘도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족장으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사라에게 명령하면 그만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에게 각각 재산과 땅을 주면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동안 자신이 사라에게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고민은 사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입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버렸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사라에게 큰소리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사라가 시키는대로 해야 자신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사라의 편을 들어주시면서 사라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사라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삭이 네 씨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십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갈을 보냅니다. 사라는 גָּרֵ֛שׁ 가하쉬 : 내 쫓다 라고 강하게 말했지만 아브라함은 יְשַׁלְּחֶ֑ 샬라흐 : 가게 하다, 보내다. 가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약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니 아침 일찍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워 줍니다. 너무 한 장면입니다. 아이 하나 챙겨 가기도 어려운데 어깨에 물 한 가죽을 메고 여인 혼자 광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염두한 일입니다.
본래 고대 사회 법에도 종을 내보낼 때는 가축과 다른 것들을 같이 보내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부대 겨우 주고 보냅니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암담한 처지입니다. 프레데릭 구달이라고 하는 화가의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는 작품을 보면 광야 길을 떠나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걸어가는 모습을 그리는데요.
이스마엘이 방방 뛰며 걸어나서고요. 어머니인 하갈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오른손은 불끈 쥐고 당차게 걸어나가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피지컬도 굉장히 건장하게 그렸습니다. 강인한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표현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도 마치 족장처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복과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길을 나서고 브엘세바에 이를 때였습니다. 브엘세바는 얼마 못 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얼마 가지 못하고 브엘세바 광야에 어떤 나무 덤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서 화살 한 바탕 거리, 화살 쏘면 살이 떨어지는 거리 쯤 떨어ㅕㅈ 아들을 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마 실제로 300m 정도 떨어ㅕㅈ서 아들을 지켜봤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생명을 살 릴 수 없는 무능력한 상황을 거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의 생명에는 능력이 없는,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나타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슬픈 대목입니다. 이집트에서 팔려와 종살이를 하다가
주인의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과 함께 빈털털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이 내용을 그냥 종이 버려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부모가 되다보니 아비 없이 떠난 모자가 너무 불쌍해 보입니다. 하갈은 소리내어 웁니다. 나무 아래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소리내어 웁니다.
사실 하갈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하갈이라는 종이 '버려졌다', 혹은 '떠났다' 이렇게 기록해도 됩니다. 아니면 그냥 아예 존재 자체를 없던 것처럼 기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갈을 많이 기록합니다. 앞서서 16:1에서도 범상치 않은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복입니다.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אֵ֣ל רֳאִ֑י 엘로이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여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번성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께 오늘 16절에 소리내어 기도하고 17절에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살려내시고 또 한 번 복을 약속하십니다.
"이스마엘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은 천한 여종 하갈을 잊지 않으시고 아브라함과 같은 말씀으로 복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가지고 일어나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께 내 아픔을 소리내어 기도합니다. 내 소리를 들으시고 샘물을 채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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